일단 왜 이런 병역 혜택이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먼저 파고들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제도는 1972년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1973년
국회 입법기능을 했던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법안이다. 태생적으로 입법적 정당성을 상실한 날치기 법안이었다. “특수한 기술분야 등에 종사하는 병역의무자에게 당해 분야에서 국가에 공헌할 기회를 보장하여 이로써 병역의무를 마친 것으로 보게 국토방위와 경제자립의 국가적 목적을 균형있게 달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그럴싸한 이유를 댔지만 사실 이 제도는 엘리트 체육을 육성해 국제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스포츠 강국이 선진국’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그 밑바탕이었다. 심지어 1980년대에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뿐 아니라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나 유니버시아드대회 입상자는 물론 한국체육대학 졸업자 중 상위 10%에 든 이들까지도 병역 혜택을 받았다. 운동 좀 한다싶으면 군대에 가지 않는 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이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스포츠 인프라 기반이 약한 우리가 국제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물론 그들의 피나는 노력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기를 쓰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병역 미필자들이 메달을 딴 이유 중 병역 혜택도 큰 동기부여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면 과연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메달이 국위선양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조지 웨아가 유럽 축구 무대를 호령했다고 해 그의 조국 라이베리아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되지도 않았고 리오넬 메시가 태어난 아르헨티나를 우리가 잘 사는 나라로 인식하지도 않는 데 말이다. 메달 따서 태극기 흔들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 자체로는 우리에게 큰 감동이 전해질 수 있지만 이게 국위선양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던 건 과거 스포츠로 강대국 코스프레 하려던 시기의 잘못된 주입식 학습이었다. 이런 법안 자체가 출발부터 이상했다.
메달을 위해 오늘도 땀 흘리는 선수들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메달 획득은 국위선양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한 수단에 더 가깝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운동선수가 아닌 일반인 중 정치인, 사회복지가, 종교인, 연구원, 학생 등 다른 분야에서도 국위선양을 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꼭 운동선수에게만 국위선양이라는 이유를 들어 병역 혜택을 줘서는 안 된다. 그렇게 따지면 전세계를 누비며 공연을 해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돌 가수들 역시 같은 이유로 병역 혜택을 부여해야 한다. 국제 대회 입상으로 국위를 선양했다는 아주 후진적인 발상 자체가 이제는 납득할 수 없는 시대다. 쿠바가 아무리 올림픽에서 대단한 경기력을 선보이는 아마추어 스포츠 강국이어도 그들을 통해 쿠바의 국격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 운동선수들은 국위선양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이 목적이 그 목적인데 우리는 이렇게 냉정히 말할 용기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스포츠 스타의 행동에 대단히 애국적인 가치를 부여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