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제 평생의 한 고찰을,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비단 저만 해온 고찰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주제라서, 모두가 생각해온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제 연설을 들어야만 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의 고찰의 깊이와 폭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유가 쏟아지는군요. 그러나 당신들이 축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음. 그 비난도 마음에 드는군요. 저 또한 당신들과 같은 축생이기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비난은 무시하고 연설을 시작하도록 하죠. 제 고찰의 주제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비난과 야유는 무시하겠습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저는 이것을 인간의 '기립'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불행히도 두 발로만 온 몸을 지탱하고 두 발은 허공에 떠있죠. 이것은 우리도 쉽게 알 수 있지만, 척추에 대단히 무리가 가는 자세입니다. 몸이란 것은 애초에 그렇게 기형적으로 사용되도록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무리한 자세로 평생을 척추를 짓누르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 문제가 완화될 때는 오로지 잠을 자려 누웠을 때 뿐이지요. 여기서 역설적인 것은 바로 이 잠을 자는 행위야말로 인간에게서 가장 죽음에 가까운 행위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도달했을 때에야 생의 필연적인 고통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네? 아, 예, 비난이 아닌 질문은 받겠습니다.
그 질문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질문이군요. 애초에 기본부터 모르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해부학적 지식이 전혀 없군요. 애초에 몸뚱이란 것은 직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해보면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직립을 위해 진화했을지도 모른다니, 그런 어처구니 없는 발상은 처음이군요. 간단하게 생각해봅시다. 만약 몸뚱이란 것이 직립을 위해 진화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직립했을 때에 편안함이라던지, 아니면 어떤 모종의 장점이라도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직립의 장점은 오로지 간식을 받는다거나 칭찬을 받는 일일 뿐입니다. 또한 편안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밥을 먹을 때에도 직립으로 밥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네 다리로 몸을 지탱해서 우리의 주둥이로 밥을 먹지 않습니까?
더이상 연설을 진행할 수가 없겠군요. 대체 당신들은 생각의 깊이란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은 아주 깊은 것이기에 당신들이 이해할 수가 없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요. 내게 해괴한 질문을 했던 당신, 그래요, 또 뭐가 궁금하죠? 들어드리죠. 뭐라구요? 개 인 우리들이 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하냐구요? 세상에, 포메 라니안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면 안된다는 말입니까? 세상에 그런 법은 또 어디있죠? 도저히 진행이 안되는 군요. 여러분과 저는 질적으로 다른 개라서, 아주 조금의 가르침도 내려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세상에, 포메 라니안이라고 해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해선 안된다니. 어이가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