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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사 레포트로 썻던 유람기
게시물ID : history_91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wangGaeTo
추천 : 4
조회수 : 26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13 20:44:56

동남아시아사라는 과목을 들을때

 

레포트로 두 나라를 골라 세도시 이상을 기행하는 형식의 기행문을 쓰라는 레포트가 나온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쓴것인데

 

한번 읽어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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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유람기

 

제 1장.

광무 4년 4월 초 이렛날, 황제폐하께서 외무아문 관리 이재하를 부르시더니, 요즘 들어 영국, 일본, 러시아, 청나라 등 외세의 간섭은 점차 심해지고, 백성의 생활은 갈수록 궁핍해짐에 나라의 앞날이 심히 근심이라 하셨다. 이어 말씀하시길, 저 멀리 중국 밑에 가면 옛 월남지방에 프랑스 사람이 들어와 세를 누리고 있다하니, 경이 친히 가서 그 위세를 보고, 대한제국에 이익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피라고 하였다.

이에 외무대신 이재하는 외무아문 종사관인 나 은시경과 오랜 지기인 유생 김봉구와 함께 짐을 꾸렸다. 하지만 일행이 외국 사정에 어두운바 쉽게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마침, 한양에 프랑스 신부들이 몇 들어와 있음에, 이재하 공이 천주교도인 처남을 통해 월남땅으로 가는 길을 알아보라 시켰고, 마침내 프랑스 신부인 리슐리외 경이 동행하여 안내를 약속하였다. 이에 우리는 지체없이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에 도착한 우리는 리슐리외 신부를 통해서 프랑스 대사관에서 월남에 대한 지도책과 현지 사정에 밝은 사람을 제공받았다. 우리는 다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월남땅에 도착했다.

 

제 2장

우리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하노이라는 도시였다. 이곳은 과거 수천년간 월남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린 아주 큰 도시라고 한다. 이 도시 북쪽으로 약간만 나가면 태고적 나라인 어우락의 궁성인 꼬로아가 있다고 한다. 이 꼬로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어우락의 왕인 안 즈엉부엉이라는 사람이 꼬로아를 지으려고 수차례 시도를 했는데, 번번히 실패했다고 한다. 그때 황금거북이가 나타나서 흰닭들이 저주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고 한다. 그래서 안 즈엉부엉이 흰닭을 죽이자 성이 금방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거북이는 자기의 발톱으로 석궁을 만들라고 했는데, 그 석궁은 신궁이라 적을 스스로 물리치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황금거북이를 영물로 여기고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 이 지역은 꾸준히 중국의 지배에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했는데, 어우락을 이은 찌에우 다의 치세때 독립을 했다가 다시 한무제에게 점령당했고, 쯩씨 자매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이를 들은 이재하공이 부국강병을 이루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남녀의 구분이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라하고 옳은 일이 아닌가하며 이제 우리 대한제국이 자주독립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이 이후에도 사섭이라는 사람이 독립을 이루었다가 다시 당나라에 복속되었고, 다시 독립을 노력해서 응오, 딘, 레와 같은 나라들이 짧게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불굴의 기상을 지닌 민족이 아닌가! 그 뒤로 리꽁우언이라는 사람이 왕조를 개창하고 쭉 자주적인 국가로서 기틀을 다져왔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이곳은 응우옌씨 왕이 다스리던 곳이었는데, 국력이 쇠하여 나라가 망한 뒤, 프랑스 사람과 월남사람이 같이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을 보니, 모든 일은 주로 프랑스 사람이 결정하고 월남사람은 주로 노역 등에 이용되어 수탈을 당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국인들이 중간자 역할을 하면서 프랑스인들 돕고 월남인들을 수탈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리슐리외에게 물어봤더니, 이 지역에 대부분의 곳에서 이렇게 중국인들이 자기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이에 김봉구공이 격분하기를, 자고로 권력에 빌붙어 세를 누리는 것은 의가 아닌 것이라 중국인들은 반성해야한다고 하였다. 때마침 중국인 여관주인이 이를 듣고는 전 왕조가 오랫동안 중국인을 탄압하여 살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하였다. 또, 이재하 공이 가로되, 저렇듯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그 강건함을 뽐내던 월남도 흐르는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어 마침내 그 조국을 빼앗기고 금수와 같은 처지가 되었으니, 우리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국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두 번째로 간곳은 안남지역인데 이곳은 응우옌 황실이 남아서 통치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황제는 명목상 지배자이고 실질적인 통치는 프랑스인과 중국인이 하고 있다고 리슐리외가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리슐리외는 응우옌 황실이 어떻게 민심을 잃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이 왕조가 처음 생겼을 때, 월남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지나온 하노이를 기반으로 북부를 장악하고 있던 떠이썬 왕조는 월남사람과 월남문화를 아주 국수적으로 지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월남어로 쯔놈문자를 다시 사용했고, 소수민족과 중국인 그리고 기독교도를 매우 심하게 배척했다고 한다. 그때 남부지역에서 세를 누린 왕조가 바로 응우옌 황실의 선조인데, 그들은 떠이썬 정권이 배척한 소수민족과 중국인, 기독교도들을 전부 포섭하면서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북부의 왕조를 물리치고 하나의 나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남부와 북부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중간지역인 이곳 후예에 수도를 정하고 쟈롱이라는 연호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남북을 잇는 도로를 닦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관용의 정신은 사라지고 월남어와 의복을 강요하고 기독교도들을 탄압하면서 민심을 잃기 시작하더니, 남부지방의 소요를 잔혹하게 진압을 해서 남부의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수천년간 나라의 중심지였던 북부도 남부출신의 왕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나라가 분열되었고 결국에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들은 김봉구 공이 “각종 진귀한 물품과 비옥한 토지를 가진 광남지역을 가지고도 나라가 망하는 데는 민심을 잃는 것이 가장 큰 것이니, 우리도 민심을 잘 헤아려야할 것”이라 했다. 이에 이재하공과 나 역시 깊이 수긍하였다.

우리가 월남에서 들린 마지막 지역은 코친차이나 지방인데, 이곳은 메콩강 하류에 위치한 곳으로 프랑스인들이 직접 지배하고 있었다. 이곳은 특히 땅이 매우 비옥하여 일 년에 3~4번씩 벼농사가 가능했다. 누군가가 그러기를 이곳에서 나는 쌀만으로도 전국의 백성이 다 먹고 살수 있다고 할 정도이니, 비옥한 토지가 부족한 우리는 참으로 부러울 뿐이었다. 또 중국인들이 큰 배를 가지고 무역에 종사해서 항시 수많은 서양식 물건과 상인들이 왕래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 월남에서 우리는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인들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큰 집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는데 비해, 월남인들은 프랑스가 파는 아편에 중독되고 과도한 수탈로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었다. 이에 이재하 공은 우리는 이곳에 비해 토지도 비옥하지 않고, 진귀한 물건도 드문데, 계속해서 낡고 불편한 제도만 유지하려고 한다면 이곳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떨어질 수 있으니, 어서 빨리 개화를 해서 서양의 신식문물로 근대화를 이룩해야한다고 했다.

반면에 김봉구 공은 나라가 강건하게 되는 것은 민심을 튼튼히 하고 인과 의가 굳건하게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며, 이곳의 응우옌 왕조가 서양의 무기들을 들여와 통일을 이뤘음에도 나라가 망한 것은 민심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고로 기계라는 것은 사람의 인성을 해하는 것이니 우리는 옛 것의 전통을 굳건히 지켜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제 3장

우리는 월남을 보고나서 옆 나라인 태국으로 향했다. 태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우리는 상당히 들떠있었다. 왜냐하면 태국이란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를 늘려가는 이 혼돈의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국의 영내로 처음 들어서 본 것은 놀랍도록 서구화된 모습이었다. 멀리서 기차소리가 들려오고 항구에는 증기선이 정박해있는 모습을 보고 여기가 과연 아시아 국가인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시장을 지나다가 한 무리의 아이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아이들은 저마다 한보따리의 책보를 들고 있었는데, 이를 본 이재하공이 어디로 가는지 묻자, 그 중 가장 큰 아이가 나와서 ‘우리는 모두 학교에 가는 중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이재하 공이 ‘너희들은 모두 양반의 자제구나’ 라고 하자, 아이들은 ‘아니요. 우리는 모두 일반 백성의 자식입니다. 저희 국왕폐하께서 누구나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라고 했다. 이를 본 이재하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자고로 나라가 부강하려면 인재가 많아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반상과 신분의 귀천이 없이 모든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서 그중 1~2명이라도 수재가 나온다면 나라의 큰 이득이 될 것이 아닌가! 우리도 갑오년 개혁 때 신분의 귀천이 사라졌으니, 이제 누구나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널리 만들어야 할 것이야. 라고 하였다. 이에 김봉구 공이 ‘이곳을 보니 아직 노비를 부리는 것은 남아있으니,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네. 또한 모든 아이들이 반상의 구분이 없이 모두 학문의 길을 닦아 선비가 되려고 한다면, 나라의 백년지대계의 농업이나 상공업에는 그 누가 가려고 하겠는가. 이는 좀 더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네.’ 라고 하였다.

우리가 수도인 방콕으로 들어가면서 본 것은 황금빛으로 치장된 화려한 불교사원들이었다. 이 나라는 부처를 매우 숭배하여 국왕도 어릴 적에 출가를 하여 승려생활을 하다가 다시 속세로 돌아와서 왕이 된다고 한다. 이에 김봉구 공이 ‘저렇게 크고 사치스런 사원을 지으려면 백성의 고혈이 얼마나 들어갔을지 짐작이 간다.’며 개탄해 마지않았다. 방콕으로 들어오자 더욱 더 개화된 문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의 백성들은 물건을 사고파는데 서양식 화폐를 쓰고 있었고, 어디를 가던 지간에 길이 잘 뚫려있어서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수많은 서양인들이 들어와서 각자 무역을 하는데 그 규모가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인들은 서양인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항상 쥐고 일을 하고 있었다. 이는 이미 모든 권리를 상실한 체 프랑스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월남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우리는 태국이 어떻게 이런 개혁을 하고 나라를 지키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태국 궁전에 찾아갔다. 그러자 멀리서 온 손님이라며 왕의 동생인 데바윙지 왕자가 우리를 직접 맞이해주었다. 그러면서 데바윙지 왕자는 태국이 어떻게 독립을 지켜왔는지 설명해주었는데, 선대왕이 몽꿋 때부터 서양과의 조약을 체결 할 때 서양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특혜를 주는 조약을 맺으면서 나라에 대한 간섭을 배재하려고 했고, 멀어서 관리가 힘든 땅을 서양에게 넘겨주었다고 했다. 이제 김봉구 공이 ‘한 나라의 토지라는 것은 그 민족의 혼이 깃들고 얼이 서린 곳인데 그런 것을 함부로 떼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왕자가 말하길 가장 중요한 것은 서양의 한 나라만이 아니라 많은 나라와 교역하면서 한 나라가 힘을 얻지 못하게 서로 간에 경쟁을 하게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했다. 이에 이재하 공이 ‘우리는 보면 그때 그때 가장 강한 나라와 통상하려는 시도를 해왔는데, 여기서 왕자의 말을 들으니 이이제이의 계책으로 우리도 태국처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소.’라며 왕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우리가 궁을 나올 때, 왕자는 멀리서 온 귀한 손님에게 드리는 선물이라면서 보석으로 장식된 악어가죽주머니와 벤자롱이라는 진귀한 그릇을 선물로 주었다.

우리가 다시 태국 시내를 돌아다녀보니 과연 왕자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땅은 전전대 왕인 라마3세보다 절반까지 줄었지만 백성들이 하나 되어 왕 아래에 단결해있기 때문에 서양세력이 함부로 일을 꾸미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4장

우리는 태국에서 왕자와의 대담을 끝내고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우리는 프랑스 상단이 운영하는 증기선에 몸을 실고 대한제국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이재하 공이 말하기를 ‘땅을 맞대고 있는 나라임에도 한 나라는 주권을 상실하고 식민지가 된 반면에 한 나라는 틈틈 사이에서 실리를 얻어나가면서 나라를 굳건히 하고 있구나. 이제 우리고 위로는 청과 러시아 아래로는 일본이 내려오는 이 상황에서 나라를 굳건히 하려면, 각 열강 사이를 이이제이의 계로써 중재하고 신분의 귀천이 없이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신식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김봉구 공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허나 제 아무리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이라도 인간의 도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어찌 소용이 있겠나. 저 월남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침입에 맞서서 민족을 지켜왔지만 결국에는 나라를 잃었고, 태국 또한 나라와 사직은 지켜냈으나, 영토를 잃고 불평등한 조약을 맺는 등 체통을 잃지 않았나. 우리는 인과 예를 중시해서 서구열강들이 우리에게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게 만들어야 할 걸세.’ 라고 하였다.

대한제국으로 돌아와 황제폐하에게 이 기록과 태국에서 얻어온 진귀한 물건을 바치자 황제폐하께서 심히 기뻐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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