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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게시물ID : panic_911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야설왕짐보
추천 : 27
조회수 : 6158회
댓글수 : 31개
등록시간 : 2016/10/11 15: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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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세노인 (1).jpg
등장인물22.jpg
※ 동명의 소설 및 영화와는 무관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1.
 
실로 멍청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영혼을 대가로 악마와 계약을 하다니...
하지만 공상 속에서나 가능한 그 일이 나를 찾아 왔을 때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난...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인생은 우리들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이미 지나가 버린다.’
- 오 헨리 -
 
 
*****
 
그러니까 네 소원은 그거 아냐. 폐병이 나아서, 100살까지 아프지 않고 살다 죽는 것.’
물론입니다. 의원 말이 길어야 몇 달이라더군요. 그런 제가 그 외에 무슨 바람이 있겠습니까?”
좋아. 그럼 됐어. 그 소원 내가 이루어 줄게. 간단하고 좋네. 100살까지 아프지 않고 사는 것. 그거면 되는 거지?’
말이라도 고맙군요. 당신이 정말 악마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정말로 제 병이 나을 것 아닙니까.”
걱정마. 소원은 확실히 이루어졌으니까. 대신 대가는 후불이야. 백번째 생일 날, 그 때 다시 찾아올 께, 잊지마 이제 당신의 영혼은 내꺼라는 걸!’
 
실없는 이의 농담이라 생각했다. 나라는 망했고, 의약품은 부족했다. 설상가상 전염병까지 창궐해 매일 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세상이 흉흉하자 무당이니 뭐니 하는 별별 미..놈들이 다 제 세상이라도 만난 양 난리를 쳐 댔다. 경성 의료원 앞 뜰의 나무 등치,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도 신기했지만, 정말 신기한 일은 다음 날 벌어졌다.
 
어떻게 된 거죠?”
 
담당의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몇 번이고 청진기를 들이대고 눈을 까뒤집어 보며 어떤 착오가 있는 건 아닌지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들은 대답은 그거였다.
 
기적입니다.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이창주씨의 병... 모두 나았습니다. 완칩니다. 완치!”
... 말도 안돼...”
 
순간, 의료원 앞에서 사라진 그의 말이 떠올랐다.
 
걱정마. 소원은 확실히 이루어졌으니까. 대신 대가는 후불이야. 백번째 생일 날, 그 때 다시 찾아올 께, 잊지마 이제 당신의 영혼은 내꺼라는 걸!’
 
실없는 농담이라 치부했던 그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는 악마였고,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와 거래를 해 버린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기뻤다. 그냥 기쁜 정도가 아니라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죽음을 눈 앞에 두었던 자에게 있어 완치란 궁극의 소망이다. 당장 꺼져가던 촛불이 횃불이 되고 또 커다란 모닥불로 변모해 활활 타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문제는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요상한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병이 치료되자 슬그머니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들었는데, 영혼을 팔면... 그 대가로... 영영 지옥의 유황불에서 헤어날 수 없다던데...”
덜컥 겁이 났다. 내 나이 서른, 백 살까지는 70년이나 남았다. 길고도 긴 세월이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하면 고작 70년이다. 70년의 수명 연장을 위해 영원처럼 길다는 사후를 지옥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영원을...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끔찍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억울하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인간사 70년의 인생(人生)과 영겁(永劫)의 세월, 어느 쪽으로 저울의 추가 기울지는 명확했다. 처음부터 어렵지 않은 계산이었다.
사후세계가 있는 지 몰랐을 때야 그렇다쳐도,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된 지금, 아무래도 생각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다들 그러지 않는가? ‘사람 마음 똥누러 갈때와 누고 난 다음이 다르다,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 계약이었다. 놈이 달콤한 말로 나를 꼬드겼다.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실상은 지독히도 불합리한 사기에 다름 없었다.
그렇다고 계약을 물릴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맺은 계약을 악마가 물려줄리도 없거니와 물려준다해도 그건 그것대로 큰 문제였다. 당장 병으로 고통받다 죽는다는 것. 그걸 반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겁도 많고 여러모로 부족한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죽음이란 존재는 감히 감당할 수 조차없는 무시무시한 중압감이었다.
 
오 신이시여 인간은 왜 이리도 나약한 겁니까?”
 
나는 고뇌했다. 지옥의 유황불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는 삶도 두렵지만 당장 눈 앞에 닥친 죽음 또한 반가이 맞이할 수 없었다. ‘일단은 살고 볼일이라는 단순한 진리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다. 나는 살고 싶다. ... 좀 더 오래... 지독히도 오래 살고 싶다.’
 
그때부터 은밀히 모처의 천주교 모임에 나갔다. 성경까지 구해 읽으며 미친 듯이 지옥과 악마의 생리에 대해 공부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돌아오는 것은 절망 뿐이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자들의 말로. 그것은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수없이 많은 가시덤불 속에서 굴러야하는 통념의 장소
수천도의 열기가 인간의 골수 그 말단마저 태운다는 고통의 향연
절규와 후회만이 불길과 함께 타오른다는 저주받은 땅.
그때 결심했다. 어떻게든 이 계약을 파기하고야 말겠다고...
 
그래! 물릴수는 없어. 난 죽고 싶지 않다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어떻게든 놈이 계약 조건을 어기게 만들어 그걸 빌미로 계약을 파기하는 거야!”
 
나는 경성의료원 앞 뜰에서 나누었던 악마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곰곰이 되짚어보니 중대한 계약의 허점들이 드러났다. 나는 그 빈틈을 노리겠노라 마음먹었다.
 
좋아. 그럼 됐어. 그 소원 내가 이루어 줄게. 간단하고 좋네. 100살까지 아프지 않고 사는 것. 그거면 되는 거지?’
 
조건은 간단했다. 백번째 생일, 그 때까지 내가 아프지 않고 사는 것, 확고하고도 명확한 계약의 대 전제가 나로 하여금 꾀를 내게 했다.
 
‘100... 허나 그 전에 내가 죽는다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불현 듯 나를 비춘 희망에 너털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렇다. 조약하지만 실로 기발한 발상이 아닌가! 계약이 정한 대전제를 깨고 정확히 99세의 마지막 날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99, 비록 나는 죽지만 60을 넘기기도 힘든 세상이다. 죽지 않을 순 없지만 남들보다는 월등히 긴 세월을 살다 죽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계약은 자동으로 파기 될 것이고, 간발의 차이로 계약을 완수하지 못한 악마는 실패를 곱씹으며 처절한 한탄을 토해낼 것이다.
하지만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의 죽음과 동시에 상황은 이미 종료.
명색이 악마인데 제 입으로 한 약속은 지킬 것이 아닌가?
 
됐어! 보인다. 실낱같은 희망이! 그리고 구원의 비책이!’
 
물론 문제는 있었다. 그 동안 내가 연구한 성서의 내용에 따르면 약간의 위험부담은 존재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즉 나는 하나의 성전이고 나 스스로 나를 파괴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멸한다-지옥에 간다-는 구절이 있었다. 분명하게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갑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에둘러 그런 가능성을 성경으로 비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비록 자살을 해서 지옥에는 가지만 그게 영원을 답보할까?’란 의구심이었다. 지옥에는 가겠지만 내가 지은 자살의 죄만큼만 보내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살이 제 아무리 큰 죄라 하더라도 어디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과 비교할까?
 
외국인 신부 말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는 회개해도 소용없다던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결정은 손쉬웠다.
나는 곧바로 계획을 세웠다.
 
하나. 99세의 마지막 날 까지 악마가 준 삶을 즐겁게 영위한다.
. 99세의 마지막 날 완벽한 죽음을 시도한다.
. 자살의 죄로 잠시 지옥엔 가겠지만, 최대한 회개하여 형기(刑期)를 최소화 한다.
 
단순하면서도 완벽한 계획이었다. 물론 악마의 눈을 피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죽느냐는 좀 더 고민해야 할 여지가 있었지만,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에겐 악마가 선물해 준 70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내 삶을 영위하며 고심해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
 
이른 아침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검었던 머리가 이제는 온통 하얗게 세었다. 허리도 굽었다. 손 마디와 얼굴,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온통 주름 투성이다. 99, 지역 최고령의 장수 노인, 나를 수식하는 단어들이 여럿 떠올랐다. 고령화 시대가 되었다지만 99세의 나이는 난공불락의 고지였다. 처음엔 뒤를 쫓던 이들이 많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니 대부분이 죽고 없었다. 두명인가는 94세까지 내 뒤를 쫓았지만 95세가 되자 더 이상 동갑내기 친구는 없었다.
반면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건강했다. 99세가 된 지금까지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리는 적이 없었다. 이런 말 하긴 민망하지만 모두 다 악마와의 계약 덕분이었다.
 
좋아. 그럼 됐어. 그 소원 내가 이루어 줄게. 간단하고 좋네. 100살까지 아프지 않고 사는 것. 그거면 되는 거지?’
 
정말로 한 번도 아프지 않고, 별다른 근심 걱정 없이 69년이란 세월을 흘려 보냈다.
다들 나를 부러워 했고, 나는 세월의 산 증인이 되어 이 날까지 살아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왕에 팔 영혼 왜 좀 더 비싼 값에 예를 들면 부자로서 떵떵거리며 100세까지 팔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는 남았다. 지역 최고령의 노인이 되었지만 정부의 옹색한 노인부양 정책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어, 80세 이후로는 줄 곧 폐지를 주우며 소일거리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나마 올해부터는 그만 두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내 나이 아흔아홉, 예정된 죽음의 순간이 임박해 있었다.
값비싼 고철이나 폐지 따위, 죽음 앞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살이든 계약만료든 어차피 난 죽는다.‘
 
게다가 지난 세월, 나는 많은 영화와 소설들을 보아왔다. 대부분 악마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늘 줄기차게 말했다. 악마와의 계약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지 말이다. 대게의 작품에서 표현된 악마들은 달콤한 과실로 인간을 현혹하고 뒤로는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 댄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리고 욕망에 맬몰되어 수락한 계약이 어떤 화근을 불러오는지에 대한 계몽이 주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곤해도 당사자인 나에겐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러고보면... 그 악마... 제법 순진하고 우직한 놈이였어...’
 
영화 속의 악마와 달리 내가 만난 악마는 깔끔한 스타일이었다. 계약과 관련한 꼼수는 물론, 예상치 못한 불이익은 전혀 없었다. 지난 69,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은 채 무탈히 살아온 내 삶이 바로 그 증거였다.
악마는 악마답지 않게 순진하고 약속도 잘 지켜주다니,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까? 미천한 인간인 난... 그 약속, 지킬 생각이 없는데. 크크큿
 
순진한(?) 악마와 달리 성서를 끌어 안고 사는 나는 꽤나 영악했다. 어쩌면 임자를 잘 못 만난 건 악마일지 모른다. 인간 쪽에서 계약을 파기할거라곤 아마 털 끗 만치도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영원을 지옥에서 보내고 싶은 자는 없다. 지금부터 난 계약의 맹점을 파고들 것이며, 그로인해 계약은 파기 될 것이다.
그 죄가 하늘에 닿아 비록 지옥에 머문다 하더라도 그 기간은 한시적이다.
이 날을 위해 59년을 매일같이 성당에 나가 회개와 구원에 대해 공부해왔다.
계약 파기, 그 실낱 같은 가능성에 내 모든 것을 걸기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날이 다가왔다.
 
백번째 생일 D-1...’
 
나는 나의 백번째 생일 선물을 조금 앞당겨 주겠다 결심했다.
 
지옥에서의 대 탈주(脫走)라는 선물로 흐흐흐...’
 
 
인생이란 오늘은 싸우고 내일은 이기고 그리고 영원히 죽는 것이다.’
- 빅토르 위고 -
2.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 속히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지난 69년간 계획해온 나의 자살 계획, 그 첫 번째 복안은 지하철 투신이었다. 오늘 날, 대부분의 역사(驛舍)는 승객의 안전을 위해 스크린 도어를 설치 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예외는 있게 마련이다. 하늘이 도왔을까? 생긴 지 얼마 안 된 이 곳은 시공상의 문제로 개통된 지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아직 스크린 도어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를 위해 늘어놓은 철제 프레임들이 이용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오직 한 사람.
나만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왔는가?”
 
저 멀리 조그맣게 열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내 인생도 끝인가?’ 최고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었다. 100세를 채우지 못하고 죽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차피 병으로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걸 천운을 만나 69년이나 끌어온 것이다. 당장 끝나더라도 후회 따위 남을 리 없었다.
그러한 생각들이 모여 플랫폼 앞에 선 나의 두려움을 조금은 마비시켜주고 있었다.
 
타이밍을 맞춰! 너무 일러서도 안되고 너무 늦어서도 안돼!’
 
후회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긴장감까지 없지는 않았다. 긴 세월 죽음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속의 일일뿐, 누구나 그렇 듯 죽음이란 일은 신을 제외하곤 모두가 초심자인 것이다.
몇 번이나 역사에 찾아와 답사를 하고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모의연습을 해왔지만 막상 뛴다고 생각하니 무릎이 휘청였다. 겁이 난 것이다. 그 사이 열차가 성큼 다가왔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다 플랫폼에 임박해서 조금씩 속도를 감하고 있었다.
 
저기에 깔리면 내 몸은 순식간에 토막이 난다. 짓이겨지고 박살이 날꺼다. 하지만 어차피 순간의 고통이야. 영원히 지옥의 유황불에서 타오를 순 없지!’
제 아무리 죽음의 고통이 끔찍하다고는 하나, 영원의 형벌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거야 말로 수지맞는 장사가 아닐까?
그렇게 결심을 굳혔다.
 
가자!”
 
한 마리의 새처럼, 나는 뛰어 올랐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난 너무 늙고 지쳐 그들의 세세한 감정까지는 신경 쓸 수 없었다.
 
꺄아악!”
사람이! 사람이 철로에 떨어졌다!”
어떡해요! 누가 좀!”
 
어차피 죽을 거라면, 멋지게 끝내고 싶었다. 흡사 내 집 안 방에 누워 평화로운 임종을 맞이하듯, 차가운 레일을 베게삼아 누웠다. 뒷 통수가 조금 시려웠지만 견딜만은 했다. 어차피 곧 사그라들 인생이 아닌가.
 
오너라... 어서...”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때, 주마등(走馬燈)이라 했던가? 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면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지고 살아온 모든 순간이 눈 앞에 펼쳐진다더니, 나 역시 그랬다. 지난 69년의 세월이 그림처럼 뇌리를 스치고, 맹렬히 달려오는 열차의 모습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철로에 누운 날 발견한 기관사의 표정도 생생하게 보였다. 그 눈빛, 벌린 입, 경악하며 열차를 정지시키기 위해 허우적 대는 손짓도 마치 정지화면처럼 더디게 흘러갔다.
 
이제사 멈춘다고 그 큰 놈이 쉬이 설 리가 있나? 허허!”
 
끼이이익하는 브레이크의 파열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급히 브레이크를 작동시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거리가 너무 가깝다. 꼭 밟고 지나지 않더라도 그 육중한 무게가 나를 깔아뭉개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성공을 확신한 난 느긋한 마음으로 옛 친구의 시 한 수를 읊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제에는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하지만 그 순간, ‘두둥실몸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환호를 하고 누군가는 놀라 소리쳤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 안은 채 반대쪽 철로로 뛰어든다.
 
노인 양반, 괜찮으십니까? 발을 헛디딘 모양이죠?”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그때 누군가 나의 얼굴을 보았더라면 생애 가장 처참한 표정이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뜻밖의 구조에 낙담한 내 얼굴은 일그러진 채 꽤 오랫동안 구겨져 있었다.
우스운 일은 인터넷 기사 한 귀퉁이에 내 이야기가 실렸다는 점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철역에서 발을 헛디딘 노인A를 구한 용감한 시민 B의 이야기였다.
당연히 A는 나고, B...
B...
그제야 불현 듯 떠올랐다.
69년 전 그 밤... 갑자기 나를 찾아와 말을 건네고...
실 없는 농담인 듯 포장해 계약을 맺고 돌아간 그 놈!
세월에 묻혀 잊고 있던 그 얼굴이 비로소 떠올랐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역에서의 일을 곱씹을수록 의혹은 점점 더 확신이 되어 갔다. 나를 구한 그의 용감한 행동에 다들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할 때, 그는 겸손한 척 고개 숙였지만 한 순간... 그래 한 순간... 나를 향해 돌아 보며 웃었다.
비웃음, 조소... 그리고 한심하다는 표정...
 
‘69년 전 경성 의료원에서 보았던 그때 그 표정이다!’
 
불길한 예감이 치밀었다.
놈이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그런 불길함이...
 
*****
 
다음부터는 조심하십쇼. 거 연세도 있는 양반이 누구 인생 말아먹을라고 참...”
 
철도 경찰의 간단한 조사 후, 나는 즉시 훈방처리 됐다. 다른 이들에겐 역장 나부랭이의 잔소리가 꽤나 감동적으로 들리겠지만 내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죽어야 한다.
그것도 내일이 오기 전에 죽어야만 한다.
역설적이게도 오직 죽음만이 나를 살릴 수 있었다.
 
지나간 실패에 연연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곧장 두 번째 계획에 착수했다.
두 번째 계획은 첫 번째 계획만큼이나 심플한 방법이었다. 미리 가까운 시골의 농약상과 친분을 만들어 둔 후, 운명의 날이 찾아오면 그를 찾아가 잘 듣는 농약 한 통을 사는 것이다. 종이컵 반 잔 분량만 마셔도 치사량이라는 극약이다. 몸 속에 들어가자 마자 염산처럼 장기를 녹여버려 순간적인 쇼크도 찾아 온다. , 순식간에 내일을 지워주는 치명적인 약인 것이다.
열차 사이로 뛰어 들어 사람을 구하는... 그런 천재일우의 행운 따위, 찾아들 여유가 없었다 .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내가 놈을 너무 얕봤다는 걸...
 
어쩌죠? 농번기도 아니어서 잔뜩 쌓여 있었는데, 하필 오늘 아침에 어떤 젊은 친구가 찾아와서는 급히 필요하다면서 몽땅 사갔지 뭡니까! 하하핫! 괜히 헛것음 하게 해서 미안하우. 거 좀 기다려 보슈 노인양반. 내 지금 주문 해놨으니 내일은...”
닥쳐! 내일은 필요 없단 말이다!”
얼래? 왜 나한테 역정이래? 노인 양반 헛걸음해서 화가 나신 건 이해하는데, 나한테 이러시는 건 아니지요. 낼 다시 오면 구해준다 안하오?”
시끄러 이 멍청한 자식아! 내일이고 나발이고, 오늘이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니까 그래!”
허 참... 저 노인네... 노망이 났나? 왜 저렇게 화를 내고 그래? 지옥에나 가라!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라구!”
 
조금 당황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화를 내버렸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농번기도 아닌데, 누가? ? 그 많은 농약을 그것도 하필 몽땅 다 사가느냔 말이다.
혹시나했던 내 마음은 역시나로 돌아왔다. 농약상을 채근해 사간 놈의 인상착위를 물으니, 몇 마디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 우연이란 없는 법, 역시나... 놈이었다.
 
빌어먹을... 악마! 대체 어디까지 방해할 생각이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나는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69년을 준비해온 죽음이다. 내게도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둔 것들이 많았다. 번개탄, , 고장난 전기 콘센트, 심지어는 총까지 몰래 사두었다. 악마 그 놈이 얼마나 영악한 놈인지는 몰라도 나의 준비성을 보면 아마 감탄사를 터트리고 말 것이다.
이렇게나 죽는 방법이 많은데, 제 아무리 대단한 악마라 할 지라도 그 모든 수단을 무력화 시키는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래...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확실히. 내 손으로... 완전히 끝장을 내 주지!”
 
나는 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곤 집 안에 널려 있던 도구들 중 몇 가지를 한데 모았다. 이번에도 방법은 간단했다. 다만 각각의 개별적 자살 방식을 묶어 도저히 살려낼 수 없는 방법을 만들고자 했다.
 
하나. 욕조에 물을 받은 다음 그 안에 헤어드라이기를 안고 뛰어 든다.
어차피 죽을거라면 고통을 채 느끼기도 전에 의식을 잃고 싶었다. 감전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사고의 온상이고, 220V의 전압이 주는 충격은 순식간에 내 의식을 끊고 늙은 내 심장을 멈추게 만들는데 충분해 보였다.
 
. 밀폐된 욕실 안에서 번개탄을 지핀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나의 자살은 어디까지나 악마와의 계약을 파기할 목적이지, 나 스스로가 고통받기를 원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난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가길 원한다. 번개탄이 내뿜는 일산화 탄소는 이미 수 없이 많은 자살 희망자들의 조력자였고, 혁혁한 성과를 냈다. 그들이 번개탄을 선택한 이유 역시 일산화 탄소 중독에 의한 점진적인 죽음이 의식을 먼저 앗아가기에 최후의 순간이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 욕조 안에 뜨거운 물을 받아 둔 다음 손목을 긋는다.
자살의 바이블, 기본 중의 기본, 손목의 동맥을 끊어 버리는 이 방식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오랜세월 애용된 방식이다. 처음 손목을 그을 때는 조금 아프겠지만 뜨거운 물은 혈액의 응고를 막아줄 것이고 과다 출혈은 서서히 나의 의식을 빼앗아 갈 것이다.
 
... 어디 한 번 두고보자. 과연 이래도 네놈이 나를 살릴 수 있을까?”
 
좁은 공간 안에 세 개의 절대적인 자살공식들을 우겨넣고 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거울에 비친 난 제법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두 번째 자살이 실패한 순간부터 생긴 오기 때문이었다.
 
두고보자. 반드시 죽고야 말겠다. 보란 듯이 죽어서 그 계약, 꼭 파기하고 말겠다.’
 
그렇게 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누굴까? 의아함과 함께 약간의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이상하게도 뒷목이 서늘하다.
지난 몇 년 간, 최종적으로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난 세상과의 연을 거의 끊어버렸다. 농약상과 소수의 자살까페 회원들 외엔 누구도 만난적이 없다. 당연히 나를 방문하는 사람도 없었다.
 
헌데 왜 하필 지금? 누가?’
 
그런 생각이 들자 불현 듯 온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놈이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보지 않아도 보였다. 심증이지만 이 정도 예감이면 거의 확신이나 다름 없었다.
자살을 목전에 둔 나... 그런 나를 누군가 찾는다면 100%.
그 놈...
 
빌어먹을 악마...’
대체 무슨 생각일까? 나를 달래거나 협박해서 자살을 중단케 하려고?’
필요 없어! 난 기필코 죽고야 만다.’
 
나는 급히 마음을 다잡고 물을 틀었다. 좁다란 욕조 속으로 거센 물줄기가 콸콸콸 쏟아졌다. 만약의 실패를 우려해 물은 혈액의 응고를 막아줄 수 있도록 뜨거운쪽으로 돌려 놓았다. 그러자 얼마 안가 욕실은 온통 수증기로 가득 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다. 뿌연 수증기의 연무가 마치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나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 물이 차자, 나는 마지막을 꿈꾸며 물 속에 발을 담궜다.
 
앗 뜨거워! 어우... 데일뻔 했네...”
 
손목을 그을때를 대비해 뜨거운 물을 틀었었는데, 욕심이 과했던 모양이다. 욕조 안에 발을 집어 넣자마자 너무 뜨거워 나도 모르게 발을 빼고 말았다. 사실 우스운 일이었다. 죽겠다는 놈이 좀 뜨겁다고 물에서 발을 빼다니, 순간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지만, 고통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것이다. 아울러 살이 데일 정도의 온도가 아니라도 자살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나는 급히 수도꼭지의 레버를 돌려 냉수를 틀었다. 반신욕을 할 때보다 약간 더 뜨거운 정도... 그 정도면 딱 좋겠다라는 미지근한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이상했다. 찬물을 틀었는데도 도통 냉수가 나오지 않았다. 외려 전보다 더 뜨거운 물들이 욕조를 채운 후 콸콸콸 넘쳐 나고 있었다.
 
뭐지? ... 아니 이게 왜 갑자기...”
 
의아했다. 하지만 답은 멀지 않았다. 저 멀리서 또 한 번 쿵쿵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나왔습니다. 선생님 문 좀 열어주십시오. 배관에 문제가 생겨서 아파트 전체가 다 온수만 나오고 있습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신속한 공사를 위해 댁 안의 수전 밸브를 잠갔으면 하는데요. 잠깐이면 됩니다.”
... 그랬구나... 알겠소. 거 기다리슈.”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이 아파트에 산지 벌써 30, 단언컨대 온수가 나오지 않아 애를 먹은 적은 있었지만, 온수가 잘나와 애가 탔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공사를 위해 집 안의 수전 밸브를 잠가야 한다고? 애초에 이 수작부터가 허술했다. 국토해양부 소유의 이 임대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그야말로 신의직장인 공무원이나 마찬가지라 할 만 해서, 어떤 일에도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늘 태평하고 수동적이기 그지 없었다.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통보를 하는 등의 수고로움 보다는 관리사무소 앞쪽의 중앙 밸브를 잠그는 방식을 택할 것이며,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전화가 빗발쳐야 그제야 비로소 잠시 단수합니다.’ 정도의 방송을 해주는게 고작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친절은 지극히 수상할 뿐이었다.
나는 즉시 증오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거짓말 마! 이 악마! 또 나를 방해할 셈이지! 내가 그리 쉽게 속아 넘어갈 것 같아?”
 
화가 난 나머지 난 악다구니를 질러버렸다. 그리곤 즉히 손에 든 헤어드라이기를 치켜 세웠다. 물이 뜨거워 데일 것 같았지만 곧 죽을 건데 그 쯤이야 뭐 어떠냐는 각오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놈이 문을 따고 들어와 말리기라도 하면 큰 일이었다. 어떻게든 놈이 밖에 있는 사이 일을 저질러야 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놈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배관도 배관이지만 벌써 세달 째 전기료가 미납되셨네요. 이거 선생님 댁 외부 배전함이죠? 순순히 협조 안하시면 여기 있는 두꺼비집, 내려버리겠습니다.”
... 뭬야?”
 
무서운 놈이었다. 마치 나를 훤히 꿰뚫고 있는 듯 했다. 이렇게나 집요하다니, 놈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지옥은 분명 내 예상보다 몇 백배나 더 끔찍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놈을 떨쳐내야 했다. 놈이 두꺼비 집을 내려 전기를 끊어 놓기 전에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그렇게 난, 최후의 결단을 내리고 굳은 각오로 헤어드라이기를 부둥켜 안은 채 장렬히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풍덩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뜨겁다.
그냥 뜨거운게 아니라 미치도록 뜨겁다.
하지만 살갗의 시큰거리는 고통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 내가 죽지 못했다는 방증임에 틀림 없었다. 그에 따른 자괴감과 실망감은 화상의 고통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뜨겁기는 오지라게 뜨거웠다.
 
앗 뜨거와!’
하지만 지옥의 유황불은 이 까짓 욕조 온수 따위완 비교도 안 돼겠지?’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어느새 욕실 안은 어둠에 잠기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놈이 한 발 먼저 외부 단자의 두꺼비집을 내린게 분명했다. 감전사를 꿈꿨던 네 번째 시도는 결국 실패,
나는 즉시 물 밖으로 뛰쳐 나왔다. 어두워 보이진 않지만 분명 온 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화끈거리고 또한 시큰시큰했다. 놈이 원망스러웠다. 떠오르는 모든 저주의 말들을 놈에게 퍼부었다.
연거푸 나를 살려내고 있는 잘난 은인(恩人), 그 놈에게...
그러나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있었다. 놈은 이미 내 계약을 이행하려 코 앞까지 와 있다. 최대한 빨리 죽어야 한다.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즉시 변기 위에 올려두었던 라이터를 켜고 번개탄을 찾았다.
 
그래 번개탄... 자살인의 가장 친근한 벗...’
 
보통은 밀폐된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우지만 환풍기가 꺼진 욕실은 차 못지 않은 완벽한 공간이었다. 어차피 놈은 밖에 있고 안에 있는 건 나다. 온수 배관을 조정하고 전기를 끊는 것이야 밖에서도 가능하지만 안에서 피운 번개탄 만은 놈도 어쩔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 ... ...”
 
라이터가 시끄럽게 딸깍 거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불은 붙지 않고, 그렇게 라이터만... 허망하게 빛을 발했다.
왜 나는 미련하게도 라이터는 변기 위에 올려 놓았으면서, 정작 제일 중요한 번개탄은 바닥에 두었을까?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쩌랴. 욕조가 넘치며 흘러나온 물은 번개탄을 흠뻑 적셔 놓았고, 그 덕에 번개탄은 불이 붙타기는 커녕 꺼무죽죽한 흑수(黑水)를 쏟아내는 스펀지가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내던져진 번개탄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내가 느낀 절망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왜 나는 내 마음대로 죽을수도 없는가!’
쿵쿵쿵
선생님... 이제 그만 포기하시고 문 좀 열어보시죠 네? 흐흐흐 자꾸 이러시면 문을 강제로 뜯는 수 밖에 없습니다.”
쿵쿵쿵
 
놈이 쿵쿵거리며 문을 두드려 댔다. 겨우 정신이 든 난, 급히 어둠 속을 헤맸다. 헤어드라이기에 이어 번개탄 마저 실패했지만 나에겐 아직 마지막 수단이 남아있었다. 준비해둔 칼, 그것이 나의 마지막 보루였다. 물은 아직 뜨거웠고 남은 것은 손목 뿐, 망설임 없이 한 방에 스윽 그거면 끝난다. 출혈이 나의 생을 마감해 줄 것이다.
... 오직 그런 생각만으로 칼을 쥐어 들었다.
 
... 베자... .. 한번에...”
 
이제 남은 것은 한번에 사정없이 그어버리는 것.
그것 뿐이었다.
 
아앗!”
 
하지만, 역시나 아팠다. 너무 아팠다. 욕조 안에 칼을 떨어뜨린 채 발을 동동구를 정도로 아팠다. 손목을 긋는 다는 것,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더니... 말로 들었을 땐 잘 몰랐는데, 직접 해보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많이 아플뿐더러 잘 잘라지지도 않았다.
제법 많은 피가 흘러나왔지만 동맥의 깊은 곳까지는 잘라내진 못했다. 이래서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궈도 곧 출혈이 멈출 것만 같았다.
 
... 안돼... 다시! 다시 베어내자. 어떻게든 동맥을 끊어내야 돼!’
 
두려웠다. 그리고 불안했다. 희망과 의지보단 걱정만이 엄습했다. 이미 거듭된 지난 4번의 실패가 남긴 잔상 때문이었다. 조급해진 난 쓰라린 손목을 붙잡고 정신 없이 물 속을 더듬었다. 칼을 빠뜨렸기 때문이었다. 좁은 욕조지만 마음이 급하니 좀처럼 칼이 집히지 않았다. 손에 무언가 닿긴 했는데 이내 발에 채여 물 속 어딘가로 사라졌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칼을 찾고 칼은 나를 피해 숨는 숨바꼭질, 물론 그 모든 기만의 배후엔 놈이 있다.
 
악마... 이 망할 자식...’
 
마음은 급한데 도통 칼이 잡히질 않았다. 전기가 나간 욕실은 너무 어두웠고, 급히 라이터를 찾아 켜 보지만 뿜어져 나온 수증기가 시야를 가려 그 마저도 허사였다.
허둥대면서도 언제 놈이 들이닥칠까 두려워하는 내 모습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미끄덩
 
칼을 주우려 허둥대다 그 난리통에 떨어뜨린 비누를 밟았을까? 순간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 허공에 떠올랐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도 그랬다.
마치 죽기 직전의 상황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으아아악!”
 
아찔함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왔다.
자칫 잘못해 이대로 욕조 한 쪽이나 단단한 타일에 머리라도 부딪히는 날엔?
 
빙고!’
 
긍정적인(?) 생각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 욕실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죽는 사람도 많다더라.’
 
불현 듯 떠오른 죽음의 예감!
하지만 조금도 불길하지 않았다. 슬프긴 커녕 기뻤다.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구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이제는 죽을 수 있는 건가?’
 
쾌재의 콧노래가 흘러왔다.
그걸 알았을까? 쿵쿵대는 문 밖의 소리가 점점 더 강해지고, 다급해진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감님! 영감님! 야 이 망할 영감탱이야!”
 
그렇지... 놈도 조급해질테지... 69년이나 기다려온 계약인데, 성사 직전에 파기되어서야 쓰나... 악마도 체면이란게 있을테니 말야.’
 
웃었다. 기뻐서 입이 찢어져라 벌려지는 통에 아찔함도 잊었다. 그리곤 쿠웅단단한 욕실의 타일이 머리통을 때린다. 욱씬거리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잠시였다. 점차로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자 고통은 뒷전이었다.
 
이렇게 죽는건가?’
 
만족스러웠다. 우연이긴 해도 나로선 최선의 결과다. 이건 누가 뭐래도 사고사가 아닌가. 어줍잖은 자살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만큼의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나... 이대로 천국에 가는거 아냐? 악마와의 계약을 깨고 지옥에서 탈출한 공으로 말야 흐흐흐...’
 
중이 염불보단 잿밥에만 관심있듯 요행수가 찾아오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얼마나 거기 머무를 수 있을까? 같은 하릴 없는 망상들이 떠오르고 곧 사라졌다.
그렇게 정신을 놓으려는 순간, 자 멀리서도 우지끈하고 문짝이 부숴지는 소리가 났다.

성공의 비결은 목적을 향해 시종일관하는 것이다.’
- 디즈레일리 -
 
 
3.
 
몸과 마음, 모두가 편안했다.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 푹신했고 향긋한 라벤더 향도 내 코를 스쳐갔다. 의식을 잃기 전의 욕실과 달리 온도와 습도 역시 너무나 쾌적했다.
그래서 난 확신했다. 여긴 절대 지옥이 아니다.
 
지옥이 아니라면?’
 
미소가 머금어졌다. 지옥이 아니라면 나머지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천국!’
그래!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나는 어서 빨리 천국을 보고 싶었다. 나의 노력의 대가, 69년 동안 꿈꿔온 삶의 종착역, 아니나 다를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쓰는 사이 젊은 아가씨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창주님... 이창주님...”
아아...”
이창주님 정신이 좀 드세요? 이창주 환자님!”
? ... 환자!”
 
머리통이 쪼개질 것 같았다. 잊고 있던 기억과 고통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듯 어지러웠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만, 극렬한 통증이 한 바탕 머릿속을 휘젓고 나자, 그제야... 잠시 잊고 있었던 부서진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 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미끄러져 넘어졌고,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지만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부수고 뛰어 들었다. 그는 쓰러진 나를 보자마자 전화를 했다. 아니 나를 보기 전부터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어디다 전화를 했을까? 119나 가까운 곳의 병원이었겠지... 사람들의 웅성거렸고 곧 일련의 사람들이 나를 들것에 실었다.
그리고... 들 것에 실려나가던 도중 보인 친근한... 아니 다급한 사람들 사이 혼자 웃고 있던 단 하나의 이질적인 존재, 나는 그를 보았다.
 
악마...’
 
내 생명을 또 한 번 살려낸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놈의 간악한(?) 얼굴을...
 
조금만 더 늦으셨더라면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뇌진탕이 오셨는데, 일단 신고가 빨랐고 신고자분께서 워낙에 초동 조치를 잘 해주셔서 생명엔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자칫 하면 돌아가실 뻔 했다구요.”
염병...”
?”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당혹스러울게다. 그렇지. 보통은 그런 말을 들으면 두 손을 맞잡고 감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릴 일이지, 하지만 난 어떤가? 그런 느긋한 자들과는 상황이 달라도 한참 다르지 않은가. 그런 내 앞에서 남의 속도 모르고 쳐웃다니, 화가 버럭 난 것은 물론 웃고 있는 의사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염병 떨고 자빠졌다고! 왜 나를 살려 낸 거야! !”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만큼 살았다고! 이제 죽어도 되잖아. 내 나이 아흔아홉이야! 왜 나를 살려낸거야!”
... 진정하십시오. 간호사 맥박 체크해... 충격을 받으셔서 어딘가 이상해지셨나봐!”
이거 놔! 이거! 죽어야 돼! 죽어야 산다고!”
치매 이력있으신가 확인해 봐. 간호사! 간호사!”
 
내가 의사의 멱살을 잡고 흔들자 곧 젊은 의사 몇과 간호사가 달려들어 나를 제압했다. 침대 옆 기기에 달린 화면에선 맥박과 혈압이 미친듯이 올라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얼마나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는지 그 의사도 전후 사정을 알았다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설명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급히 건장한 남자 간호사 둘이 달려오더니 이내 나를 짓눌렀다. 그리곤 강제로 팔을 꺽더니 급히 주사제를 하나 투입됐다.
진정제 같은 것일까? 맞자마자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축 늘어진다.
 
젠장할...’
 
의사가 말했다.
 
아흔아홉이나 되시는데 힘이 장사시네... 일단은 충격을 조금 받으신 모양이니까 푹 쉬게 둬요.”
얼마나요?”
진정제 놨으니까 환자분 연세나 체중으로 봐선 대여섯시간은 족히 자겠지... 새벽 한 시 쯤? 최소한 그 쯤은 되야 일어나실거야. 여튼 일어나면 경과 보고하도록...”
네 선생님
 
실로 충격적인 대화였다.
 
새벽 한 시 쯤?’
새벽 한 시 쯤?’
새벽 한 시 쯤?’
 
새벽 한 시면, 100세를 맞이한다. 악마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것이다.
 
안돼! 안된다고! 이 놈들!’
 
울화가 치밀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소리치려 했지만 입술은 꿈틀댈 뿐 벌려지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고도 해봤지만 도통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잠은 밀려오고 무기력감이 분노를 잠식한다.
 
이대로 잠들면 안되는데... 안돼...’
 
미친 듯이 되뇌여봤지만 소용없었다. 의식이 점차로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또 놈이 보였다.
 
그럼 환자 분... ... 쉬세요. 편히 쉬시라고 진정제는 넉넉히 넣어드렸습니다. ...”
 
간호사였다. 이번엔 놈이 간호사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자로 분했고 간호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얼굴, 그 미소는 내가 아는 그 놈이었다. 걱정하는 듯 말하고 있지만 씰룩대는 입꼬리와 반달모양이 된 눈매가 분명 날 조롱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끝인가?’
 
절망이란 낭떠러지에 매달린 기분, 나는 조그마한 돌부리 하나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버티는데, 벼랑 위에 선 놈은 웃으며 돌팔매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끝날 순 없었다. 내 목숨이고, 장장 69년을 매달려온 역사(役事). 이렇게 맥없이 멱살잡혀 끌려 갈 순 없는 것이다. ‘잠들면 안돼.’ ‘일어나야 해!’ ‘내 목숨은 내 손으로 끊는다.’ 오직 그러한 일념 하나로 나를 채찍질 했다. 하지만 어쩌랴. 아흔아홉 늙은이의 몸뚱이는 초라했다. 퍼져가는 약기운에 속수무책 눈이 감긴다.
 
악마와의 계약에 인간의 저항은 무의미할 뿐인가?’
 
손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꺼풀 역시 천근만근 무거웠다.
저 멀리 간호사가 홀로 남아 웃는다.
승리의 미소를...
 
두고보자...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아... 절대!”
 
그렇게 또 다시 의식이 끊어졌다.
 
*****
 
안돼! 안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떴지만 사방이 온통 어둡고 캄캄해서 마치 관 속에 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두렵고 또 무서웠다.
 
이 어둠이 의미하는 바는 설마?’
 
절망이 아흔아홉 노인의 초라한 어깨를 짓른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땀이나고, 숨이 가쁘다. 그제야 머리의 통증도 다시 나를 엄습한다. 화들짝 놀라 손을 뻗으니 담요와 침대가 만져진다. 입고있는 옷 역시 헐렁한 것이 흡사 환자복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벽 한 쪽에 시계가 걸려 있다.
 
오후 1130...’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어! 12시를 넘기지 않았다구!”
 
흥분한 나머지 기뻐 소리치다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놈이 알아서는 안된다. 은밀히 행동해야 했다. 놈은 내가 잠들었다 믿을테지만 나는 굳건한 의지로 난관을 돌파했다. 남은 시간은 무려 30, 늙은 이 한 목숨 끊어내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어쩌면 기막힌 반전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자정이 되기 전,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세이프 라인을 넘었다는 사실에 전율이 일었다.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놈의 표정은 어떨까? 그리고 놈이 손을 쓰기 전에 내가 일을 벌린다면?’ 그런 생각에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어렸다.
침착해야 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지막 반전을 위해 피날레 무대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눈은 곧 어둠에 익숙해졌다. 6인실의 병실이다. 각각의 침대는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돌아보니 창문이 4, 나는 즉시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투신자살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자살 방법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그러고보니 가장 손쉬우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창문을 열고 몸을 던지면 끝난다. 아련히 보이는 창밖의 풍경으로 보아 최소한 10여층 이상의 높이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제길...”
 
다시금 막막함이 엄습했다. 10층 이상의 높이도 맞고, 창문을 여는 것도 큰 무리는 없는데, 하필 추락방지용 방범창이 설치되어 있다. 아흔아홉 늙고 초라한 몸뚱이지만 저 좁은 방범창 사이로 몸을 밀어넣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 요가라도 배워둘 걸...”
 
쓸데 없는 생각들이 나의 절망감을 부채질했다. 악마, 그 놈이 마지막 순간 웃으며 마음편히 자리를 비운 이유도 어쩌면 그때문일지 몰랐다.
 
뛰어내릴 수 없으니, 내가 자살을 포기할거라 생각했나? ! 사람 잘 못 봤다. 이런다고 내가 못 죽을 줄 알아?’
 
오기가 생겼다. 놈은 실수를 한 것이다. 나 이창주를 너무 우습게 봤다. 창문이 막히면 내가 죽지 못할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큰 착각이다. 지난 69, 수없이 많은 방식의 죽음을 연구하고 고민해왔다. 어디든 반드시 구멍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난 그것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어쩐다...”
 
각오는 다졌지만 사실 마땅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병실이다 보니 날카로운 것은 보이지 않고, 목을 매려해도 맬만한 줄이 없었다. 팔에 꽂힌 링거 줄이 있지만 내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지가 의문인데다 병원 천장이 유독 낮고 평평해 줄을 걸거나 묶을만한 곳이 없었다.
다시금 절망이 밀려왔다.
바로 그때...
 
일어 나셨습니까?”
 
어둠 한 편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자정 전에 깨어난 것이 기쁜 나머지 병실 안에 나 외에 다른 누군가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맞은 편 침대를 가린 커튼이 젖혀지고 연녹색 간호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기지개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 설마... 놈인가?’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만약 반대편 침대에서 일어난 사내가 그 놈이라면 상황은 종료다. 반전 내지 역전은커녕 원사이드한 내용으로 뻔한 결말이 완성되는 것이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짙은 어둠 너머 놈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교대 근무자가 일이 생겨서 며칠째 비번없이 일하다보니 졸려서 빈 침대에서 잠깐 잤어요. 아까 응급으로 실려오신 영감님이죠? 이제 좀 괜찮으세요?”
휴우... 하아하아...”
 
거친 숨결이 토해졌다. 안도의 한숨이자 마지막 희망의 숨소리다.
 
어휴 아직 호흡이 거치시네... 수간호사님 불러드릴께요. 혹시나 일어나시면 바로 알려달라고 신신당부 하셨거든요.”
...신신당부? ... 설마 요래 요래... 저래 저래... 생긴 그 간호사 말인가?”
...”
으허! 안되네 안돼... ! 나 괜찮아. 그러니까 수간호산지 뭔지는 조금 이따가 부르게
? ... 그게... 수간호사님 말고도...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 더 계신데. 영감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악마가 아니라 안도한 것도 잠시. 그는 날렵한 동작으로 문을 향해 나섰다. 마음 같아선 그에게 달려들어 제발 사람을 부르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사정하고 싶었지만 아직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진정제 탓인 듯 했다. 비틀대며 창문 쪽으론 어떻게 걸어오긴 했지만 젊은 그의 걸음을 따라잡기엔 다리가 휘청였다. 넘어지지 않고 용케 서 있는 것이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기요. 그 영감님 찾아오신 분 맞죠? 응급으로 오신 그 영감님 깨쎴는데요?”
 
그는 문을 열자마자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문 밖에 대기하던 누군가에게 내 상황을 일러바쳤다. 영혼이 걸린 일인줄이야 꿈에도 몰랐겠지, 하지만 난 그가 원망스러웠다. 11시다. 이 늦은 시간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누구겠는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악마가 분명하다. 내 영혼을 걸고 내기를 해도 좋다.
 
아이고 노인 양반 깨셨어요? 잘됐네. 잠깐 얘기 좀 하십시다.”
 
취소다. 역시 영혼은 함부로 거는 것이 아니다.’
 
어찌된 일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놈이 아니었다. 건장한 체구, 그리고 허름한 옷가지, 난생 처음보는 사람이지만 분명 놈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긴장한 내 앞으로 걸어와서는 대뜸 신분증을 내보이며 말했다.
 
ㅇㅇ서 홍순철 경장입니다. 영감님
 
경찰? 갖가지 의문부호가 머릿속을 스쳤다. 경찰이 왜 나를 찾지? 몇 달째 전기세를 안내서? 아니면 욕조에서 자빠지며 머리를 찧어서? 그도 아니면 법이 바뀌어서 이제부턴 자살시도도 중벌에 처하는 건가? 무엇을 떠올려도 납득할 만한 것이 없었다.
결국 나는 부족한 시간에도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왜 날 찾수... 경찰양반... ... ... 죽을 때가 다 된 늙은이일 뿐인데...”
같이 가셔서 조사를 좀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대체 무슨 이유로! 내가 왜 경찰서에 가야하는데!”
 
홍순철 경장이 비닐백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보이며 말했다.
 
이런 걸 가지고 계시던데요?”
!”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히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내가... 왜 내가... 머저리같이 저걸 놔두고... 이 고생을...’
 
후회를 넘어 통탄스러운 감정이 폭발하듯 쏟아졌다. 떨리던 다리가 무너지듯 주저앉고 홍순철은 그런 날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엔... 내가 자살을 위해 준비해둔 물품 중 하나인 총이 들려 있었다.
 
그래 애초에 저것을 썼어야 했어. 머리통에 대고 쾅... 그것 한 방이면 이 고생은 안해도 됐잖아. 이 머..리 맹.추 쪼.다야!’
 
고생해서 암시장을 통해 구입해놓고도 서랍 속에 넣어둔 채 잊어 버렸다. 그리곤 괜히 애먼 욕실에 들어가 번개탄과 헤어드라이기로 죽겠다고 개고생을 한 것이다. 불현 듯 욕실 바닥에 부딪힐 때 다친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이 모든 것이 다 그 놈 때문이다. 놈이 자꾸만 방해를 하며 나를 살려내는 통에 내가 그 간단한 방법을 잠시 잊고 있었다.
 
“119 구급대가 영감님 댁에 갔다가 찾았다더라구요? 미 인가 총기소지는 불법인거 아시죠? 이건 살상력이 높은 모델인데다 최근에 총기가 사용된 유사 범죄가 몇 발생해서 급히 조사중입니다. 아 물론, 총열을 확인해보니 발사된 흔적은 없어서 영감님이 범인이 아니란 건 압니다. 하지만 사건 특성상 총기 유통책이나 브로커 쪽을 좀 쑤셔봐야 하는데, 죄다 잠수를 타거나 꼬리를 잘라버려서요.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구하셨는지 경위 좀 들어야 겠습니다. 알선책 인상착위하구요.”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진정제 투여라는 마의 관문을 혼신의 의지로 넘어왔거늘, 이번엔 경찰? 증오심이 치밀어 올랐다. 물론 악마, 그 놈에 대한 증오였다.
지하철에서 나를 구하고, 농약상을 먼저 방문에 모든 농약을 소진시켜 버렸다.
그 뿐인가? 수도 배관을 조정해 내 자살을 방해하고, 헤어드라이기를 던지려하니 전기마저 끊어 버렸다. 게다가 뇌진탕에 걸린 날 병원에 데려와 치료 후, 진정제까지 놓았다.
그런데 거기에 경찰까지 불러놔?
 
 
화가 나는 걸 넘어 이중, 삼중, 사중으로 뻗어있는 놈의 간계(奸計)에 치가 떨리고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다.
대체 놈은 나의 행동을 어디까지 예상하고 있는 것일까?
새삼 놈에 대한 경외심이 고개를 들었다.
 
놈이 나를 살렸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나는 죽는다.’
 
나는 살기 위해 죽고자 했고 놈은 죽이기 위해 나를 살렸다.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내 생명을 몇 번이고 구한 생명의 은인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 있다니...
 
인간은 결국 악마를 이길수는 없는 것인가?’
 
그 순간의 나는 좌절감에 매몰되어 있었다. 무척이나 간단하고 완벽하다 믿었던 지난 몇 번의 자살시도가 너무도 손 쉽게 제지당하자 자괴감에 빠진 것이다. 무력감, 허탈함, 실망감, 이루 말 할 수 없는 감정들이 들끓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의 영혼을 지옥이란 무시무시한 곳에 저당잡힐 순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영원의 자유, 어떻게든 놈의 마수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불현 듯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잠깐 서에 가기 전에 전화 한 통만 쓸 수 없겠소?”
그러쇼 어르신... 어디 아는 변호사라도 있나 보죠? 그래도 소용 없습니다. 최소한 벌금 정도는 내야 할 겁니다. 대한민국은 총기 소지 불법입니다.”
시끄럽고 전화기 주고 먼저 좀 나가 계슈.”
그러세요. 시간 없으니까 짧게 하시구요.”
이 눔아! 시간은 내가 더 없어!”
 
홍순철 경사를 타박하며 고개를 돌리니 시간은 어느 덧 밤 1140, 시간이 촉박했다. 어서 빨리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재빨리 번호를 눌렀다.
나의 친구
나의 조력자
정신적 지주...
그라면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도움을 줄지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받아라.. 받아라...’
 
애는 타는데 수화기 너머에선 속절없는 통화대기음만 흘러나왔다. 창 밖은 온통 어둠뿐이다. 이른 취침에 들어갔을까? 이런저런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하지만 그때, 지루한 통화연결음이 멎으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운영자님 나요. ! [99살까지만살고싶다]”
아이고 회원님 어쩐 일이십니까?”
 
전화를 받은 남자, 그는 내가 꽤 오래 전부터 활동해온 인터넷 까페 자기모(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운영자였다.
자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수없이 많은 자살 시도자들의 등불이 되어 준 남자
악마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싶었던 나는 오래 전부터 확실한 자살 방법에 대해 연구해왔고, 다방면의 조사 끝에 발견한 그의 까페는 자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노하우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비록 그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자타공인 자살의 1인자였다.
내 평생 그보다 더 자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 전철에 뛰어들기 좋은 역 모음
- 구하기 쉬운 치명적인 농약명칭과 구입처 일람
- 감전이 제일 쉬웠어요. 헤어드라이기로 손쉽게 떠나기
- 자살 실패의 주범 주저흔(손목을 단박에 긋지 못해 여러번 상처를 내어 생기는 흔적)’
- 번갯불에만 콩 볶아먹나? 번개탄으로 차에서 홍콩가자!
- 넥타이... 꼭 목에만 매란 법 있나?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 공략집!
- 러시안 룰렛? NO! 코리안 룰렛!
 
그 동안 내가 준비하고 시도한 자살의 방법들 모두 그의 까페에서 제안한 것 들이었다. 나는 진작부터 그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해 왔고, 열성적인 활동을 해왔따.
그라면... 자기모의 운영자라면,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완벽한 죽음의 공식을 내게 알려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운영자님... 지금 당장 자살해야 합니다. 묘안을 좀 떠올려 주십시오.”
아이고 회원님... 번개탄으로 홍콩가라고 게시물 올렸더니 번갯불에 콩 볶아 먹으려고 하시네요. 갑자기 자살이라뇨. 앞뒤 전후 사정은 둘째 치고라도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말씀해 주셔야 제가 뭔가 도움이 돼도 될 것 같은데요?”
 
역시 운영자였다. 다짜고짜 던져진 요청에도 당황하긴커녕 거두절미하고 주변의 도구 유무를 먼저 묻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진심으로 믿음직스운 사람이었다.
 
병원입니다. 10층은 넘는 것 같은데, 링겔줄은 있는데 묶을데가 없습니다. 침대와 TV가 있고 뭐 그 밖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어쩐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곤 이내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창문을 뛰어내리시는 게 최고죠. 자살의 바이블 아니겠습니까? 투신 자살?”
... ... 그게 방범창처럼 창살이 쳐져 있어요. 내 힘으로 뜯어내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세요... 링겔줄이 있지만 묶을데가 여의치 않다고 하셨으니... 그럼 이건 어떨까요? 링겔 병을 깨서 손목을 그으시는 겁니다.”
... ... 그게... 손목을 긋는 건 오늘도 한 번 시도했는데 잘 되질 않아요. 너무 아프고 또... 게다가 유리병으로 된 링겔이 아니라 두꺼운 PVC소재예요.”
이런... 최악의 상황이시군요. 잠시만요. 저의 자살 노트를 한 번 뒤져보겠습니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는지 수화기 너머가 고요해졌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문 밖에서 들려온 영감님 통화 끝나려면 아직 멀었습니까?’라는 채근에 나는 애가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돌아왔다.
하지만 비로소 들려온 그의 첫마디는 나의 기대를 무색케 했다.
 
안되겠습니다.”
? 왜죠?”
안되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무책임한 답변이 어딨습니까. 접니다. [99살까지만살고싶다] 까페 최우수회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자살을 인도하셨잖아요. ‘언제든 어디서든 인간은 자살할 권리가 있다.’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방법은 있다. 포기하자 마라.’ 늘 그렇게 응원하셨잖아요 운영자님!”
어허 이것 참... 난처하게 하시네. 안된다 싶으면 그냥 끊어 버립니다. 그나마 회원님이시니까 이렇게 안된다는 말씀이라도 드리는 거 아닙니까. 몰랐을 때야 몰랐으니 그렇다치지만, 알고서야 이건 도리가 아니죠.”
?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몰랐을 때야 몰랐으니 그렇다치지만, 알고서야 도리가 아니라뇨.”
뭐 그런게 있습니다.”
 
무언가 이상했다.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그의 말투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자꾸만 심기에 걸렸다.
 
! 뭡니까? 속시원하게 말씀 좀 해주십시오. 도리가 뭐고 그런 게 있다는게 대체 뭔지!”
아 거참... 집요하시네... 그러니까 제 말은... 상도의(商道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상도의요? 장사치들이 물건 팔고 살 때 따지는 그 상도의요? 스무고개 하자는 것도 아니고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자살하고 싶다는 사람 앞에 두고 상도의가 대체 왜 나오냐구요!”
 
방법이 없다는 말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무책임한 행태때문이었을까? 나는 부아가 치밀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고 화를 내며 지난 실패의 분노를 그에게 퍼붓고 있었다.
그러자 운영자는 난처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작심한 듯 속삭이며 말했다.
 
원래는 비... 비밀입니다만... 이제는 말씀드려야 할 때가 온 거 같군요.”
?”
상도의, 어차피 곧 아시게 될테지만, 지침상 이렇게 밖엔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사실 제 소속이... 하핫... ! 민망하네요. 이걸 업으로 살아온지 수백년인데, 인간에게 커밍아웃 하는 건 저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하하핫! 사실 저희는 당사자 분 외의 인간에게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저희 회사 내규인데... 이게 처벌규정이 엄청납니다. 님이야 어차피 곧 가실 분이니까 이렇게 말씀드리지만, 차라리 죽고 말지 절대 말 못해요.”
... 커밍아웃? ... 수백년? ... 설마 그럼... 운영자님의 정체도?”
하하하. 송구스럽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99살까지만살고싶다]님께는 죄송하지만 중간에 끼어든 제 입장도 좀 난처합니다. 저도 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고 다방면으로 이런저런 컨설팅을 해드린건데, 이건 뭐... 영구계약으로 이미 거래처가 정해진 분인줄이야. 꿈에도 몰랐지 말입니다. 세상이 참 좁죠? 악마 둘이 동시에 같은 사람과 이어지다니. 저도 이 생활 꽤 오래했지만 참 신기하네요. 그러니 뭐 어쩌겠습니까. 아무리 더러운 지옥바닥이라도 상도의는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자살진흥과, 그 쪽은 계약유치과, 부서는 다르지만 한 솥밥 먹는 사이에 영혼 가로채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도움이 못 되어 드려 죄송하구요. 모쪼록 계약 담당자와 좋게, 잘 마무리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 그럼 저는 이만. 오늘도 번개탄 자살 동반자 4분 컨설팅이 있어서요.”
전화가 끊겼다. 황당함을 넘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인이 정작 중요한 순간이 되자 안면을 바꿔 뒷 통수를 칠 줄이야. 배신감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모든 것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영감님 아직 멀었습니까? 시간 없어요.”
 
그나마 기대려했던 마지막 버팀목이 무너지자 머릿속은 온통 헝클어진 실타래마냥 뒤엉켜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밤 1150분을 향해 치달아가고, 문 밖엔 경찰이 나를 인도해가려 기다린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이대로 악마에게 끌려 지옥의 유황불에 던져져야 하냔 말이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어디 하나 하소연할 곳 조차 없었다.
결국 모두 내 탓이었다.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도...
어리바리하게 굴다 자살에 실패한 것도...
아군이 아닌 적군을 곁에 두고 의심없이 믿었던 것도...
 
이제와 누굴 탓할까?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라 오늘이 내일이다.
- 앤드류 카네기 -
 
 
4.
 
갑시다 노인양반!”
 
절망에 빠진 내게 홍순철 경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고, 거기에 놈의 얼굴도 보였다. 간호사의 몸을 하고 배시시 웃고 있지만 놈도 알고 나도 안다.
이것이 끝이라는 걸...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터벅터벅 문을 향해 걷자, 홍 경장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영감님... 거 당장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처럼 왜 그럽니까? 얼굴 좀 펴세요 펴! 별 조사 아녜요. 한 시간이면 끝나고, 협조 잘하시면 기껏해야 벌금형으로 끝납니다. 쫄지 마세요. 그냥 협조 차원에서 가시는거예요.”
 
그래! 나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이다! 어쩔래? 어휴... 한 시간? 한 시간이 다 뭐냐 10분만 지나면 내 인생 쫑이란 말이다!’
 
홍 경장이 미웠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아는 것이 없었다. 계약은 어차피 악마와 나, 우리 두 사람 사의 일.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죄가 없었다.
정작 화를 부추기고 모멸감에 떨게 만든 말은 따로 있었다.
 
어머! 진정제를 정량보다 많이 투여했는데도 자정 전에 깨어나시다니... 의지가 정말 대단하신 영감님이신가봐요 호호호
 
... 육시랄 놈...’
 
그 사이 나타나 빼꼼히 얼굴을 내민 그 놈, 칭찬인양 비아냥 거리는 화법이 나를 분노케 했다.
정량보다 많이 투여한 진정제...
의지가 대단하신 영감님...
대놓고 약을 올리자는 수작이었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이쯤되면 이판사판이다!’
 
그것은 순수한 분노이자 지금껏 살아온 99년의 인생을 응축한 마지막 오기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나는 몸을 날렸다. 방심한 그들을 향해 돌진했고, 커다란 덩치로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홍 경장은 졸지에 짓눌린 쥐포신세가 됐다.
 
아이쿠! 영감님! 왜 이러쇼!”
 
당황한 홍 경장이 소리쳤다. 고개를 돌리니 당황한 것은 홍 경장만이 아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조롱하던 간호사의 몸을 한 악마도 두 눈을 크게 치켜 뜬 채 놀라고 있었다.
 
하늘의 도우심일까?’
 
놀라 달려들려는 악마와 나 사이를 남성 간호사가 가로 막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그는 무슨 일인가하여 갸우뚱거릴 뿐이었고, 그 사이 난 쓰러진 홍 경장의 품 안으로 팔을 뻗었다.
내 물건... 잠시 잊어버렸던 내 물건을 찾아야 했다.
 
안돼! 이 영감탱이!”
 
총을 빼앗긴 홍 경장보다 간호사로 분한 악마의 외침이 더 크게 들려왔다. 놈은 가녀린 여자의 몸을 하고도 건장한 남성 간호사를 밀쳐내며 내게 달려 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까? 달려드는 놈보단 내 손이 더 빨랐다.
 
딸깍
 
잠금장치가 풀리고 손가락 끝이 방아쇠에 걸린다. 이제 당기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만! ... 왜 자꾸 죽으려고 하는거야! ?”
몰라서 물어? 흐흐흐 이제 다 끝났어.”
망할 영감탱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잖아. 살고 싶다고 해서 살려줬고, 수명까지 늘려줬어. 그럼 이제 너도 약속을 지켜야지!”
시끄러... 사람 맘이란 원래 똥 누러 갈 때랑 나올 때랑 틀린 법이야!”
젠장...”
 
악마가 격분한 얼굴로 나를 보며 이를 갈았다. 기뻤다. 기막힌 마지막 반전에 엔돌핀이 치솟고 희열이 몰려왔다. 길고 긴 변곡점을 돌아 기어코 보고 만 것이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번번히 나를 살려내던 악마의 얼굴에 깃든 절망을...
이젠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길 것이고, 계약은 자동 파기된다.
일그러진 얼굴의 악마는 질끈 눈을 감고,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헌데, 그때였다.
 
수간호사님 위험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저 영감 노망난 것 같아요.”
맞습니다 간호사님 비... 비키세요. 저 영감 총을 가졌습니다. 이 봐 영감! 당장 그 총 내려 놔! 안 그러면 쏴 버릴거야!”
 
남성 간호사와 홍 경장이 총을 든 나와 간호사의 모습을 한 악마를 바라보며 앞 다퉈 소리쳤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총을 내려놔? 안그럼 날 쏘겠다고?”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바라는 게 그거야 이 맹추들아!’하고 호통이라도 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는 아찔한 음모(陰謀) 하나가 있었다.
 
자살하면... 어찌됐든 지옥... 하지만... 경찰에 의해 사살된다면?’
 
실로 발칙한 계략이 아닐 수 없었다.
 
무수한 실패를 겪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
그래도 아예 지옥에 안 갈수도 있잖아.’
 
영감! 어서 그 총 내려 놔!”
 
홍 경장이 고함과 함께 총 한 방을 발사했다. 엄청난 굉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공포탄 한 발... 그 다음은...?’
 
영감님... 이건 공포탄이고 이 다음부터는 실탄이요! 허튼 짓 할 생각 말고 좋은 말 할 때 어서 그 총 놔요! ?”
 
홍 경장이 소리쳤다. 위협을 가해 내게 겁을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허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순도 100%의 치명적 실수였다.
실탄, 그리고 사살... 나야말로 바라던 바였다.
 
영감! 좋은 말로 할 때 내려 놔! 나도 지금 화났어!”
 
악마도 나를 향해 경고했다. 그런데 대체 난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의 말대로 총구를 돌렸다. 악마의 얼굴에도 홍 경장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도 그 뿐. 내 손에 든 총이 불을 뿜자 모두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럼에도 난 털 끝하나 다친 곳이 없었다. 외려 말짱한 몸으로 여유로이 미소지었다.
 
빌어먹을 인간같으니...”
 
수간호사가 아니 악마가 휘청였다. 하얀 가운 아래 그의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절룩이며 다가왔다.
 
!’
 
또 다시 한 발... 지근거리였던지라 손 쉽게 한 발이 더 놈의 몸에 박힌다.
 
흐윽!”
 
악마가 완전히 주저앉았다. 반대쪽 다리마저 총상을 입자 고통과 분노가 뒤범벅 되어 처참한 얼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역시나... 상관 없는 사람들 앞에서 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안되나 보지?”
빌어먹을 놈... 그걸 어떻게...”
자살까페 운영자가 그러더군... 당사자 외 인간에게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처벌규정이 엄청나서 차라리 죽고 말지 절대 말 못한다고...”
자살진흥과 이 등...끼들...”
 
자살까페 운영자로 분한 악마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놈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본모습을 드러내긴 커녕 고통을 참아내려 애쓴다. 아마 계약이 만료되거나 파기될 때까지는 수간호사의 몸 속에 숨어 있을 모양이었다.
 
두 다리가 엉망이지? 그래서야 나를 쫓을수 있겠어? 난 아직 총알이 두 방이나 남아있는데 말이지...”
... 악마를 조롱하다니... ... 맹세한다. 계약이 만료되면 기.... 기필코 널 지옥에서 제일 처참한 곳에 처박아 버릴거야! ! ... 설사 네 놈이 자살에 성공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지옥에 있는 내내 지금의 만행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주지!”
 
분노에 사로잡힌 악마가 두눈을 부라리며 협박의 말을 일삼았다. 하지만 어쩌랴 내 계획은 이미 자살이 아닌 것을...
그리고 내 계획의 대미를 장식해줄 마지막 조연이 방금 일어섰다.
 
... 영감! 셋 셀 동안 그 총 내려놔! 이거 마지막 경고야. 이걸 어기면... ... 발포한다.”
 
홍 경장이었다. 그는 제 소임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중간중간 속이 터질때도 있었지만 최후의 순간 최고의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두 손을 모았다.
 
이봐 홍 경장... 지금 몇시 몇분이지?”
뭐야 영감! 시간은 왜!”
궁금해서 그래... 지금이 정확히 몇 시 몇 분인지...”
“11... 1158... 왜 이 영감아... 알았으면 빨리 그 총이나 내려 놔!”
“1158... 죽기엔 더없이 좋은 시간이군. 흐흐흐
 
살아갈 시간, 이젠 겨우 2분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차고 넘쳤다.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인생을 마무리하기엔 더없이 긴 시간이었다.
 
시끄럽고! 셋 셀 동안 그 총 내려놔! ... ... 센다... 하나아...”
하아... 길고도 지겨운 인생이었어...”
두우울...”
“99세 하고도 364... 23시간 59... 완벽하군...”
세에엣!”
잘 있어라 세상아!”
 
총을 치켜들었다. 그건 우유부단한 홍 경장에 대한 나의 배려였다.
 
 
두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죽음을 예감한 듯 대미(大尾)의 주마등(走馬燈)도 밀려왔다.
 
 
삶은 죽음에 의하여 완성된다.’
- B. 브라우닝 -
 
 
5.
 
또냐? 하아... 이젠 진짜 마지막인가 보군...’
 
주마등, 이제는 식상할 정도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지만 이젠 별 감흥도 없었다. 저 멀리 홍 경장의 총구가 보였다. 빨갛게 불을 뿜더니 이내 총알을 토해낸다. 핑그르르 돌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각도마저 완벽하다. 내 이마를 향해 쏘아진 저 총알은 멈춤없이 다가와 내 두개골을 뚫고 나갈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이 지긋지긋한 삶도 끝.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음미하고 싶었다.
99년 하고도 36423시간 58... 아니 이제 59...
참으로 길고도 길었던 인생 길이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이렇게 마무리 할 수 있다니 난 참 복받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평화로운 최후의 순간에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이질감 하나가 끼어들었다.
미미하지만 웬지 신경을 거스르는 불쾌함...
 
아안돼에에에에...”
 
나는 소리 쳤다. 목소리마저 느리게 울려 퍼지는데 놈은 빠르게 나를 향해 달려든다. 분명 수간호사의 몸이 아니었다. 검고 털이 북실북실한, 악마... 그 본연의 모습!
헌데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닌, 나와 총알 사이...
놈이 끼어들었다.
 
으아악!”
 
주마등이 멈췄다. 수간호사, 아니 악마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느리게만 흐르던 시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홍 경사의 다급한 외침도 들려왔다.
 
수간호사님! 아니 이 씨커먼건 뭐야!”
 
넋을 잃은 수간호사는 홍 경장 앞에 고꾸라져 있고, 내 앞에는 시커먼 짐승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생전 처음보는 엄청난 모습...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털과 피부로 뒤덮힌 진짜 악마가 내 손에서 총을 빼앗으며 말했다.
 
넌 못 죽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살리고야 만다.”
아니! 계약은 파기야. 난 이제 죽는다.”
 
!’
 
악마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겁에 질린 채 불을 뿜은 홍 경장의 총구, 그것이 날아들었다.
마치 나의 승리를 축하라도 하듯...
 
!”
 
극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지막 주마등이다. 악마가 미처 막아내지 못한 총알이 내 이마에 닿는다. 강력한 회전이 살갗을 녹이고 뼈를 뚫는다. 생각보다 거리가 짧아 나선형의 회전은 시작되지 않았다. 허나 내 머리통을 박살내는데엔 충분한 회전이다.
두개골을 뚫고 뇌속으로 돌입한다. 빌어먹을 주마등... 나 죽어가며 이제야 깨닫는다. 아프지 않은 자살이란 없다는 걸, 순간의 고통같이 느껴지지만, 마지막 순간은 이렇게도 느리다. 모든 고통을 느끼고 감내하며 최후를 맞이한다.
실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어쩌면 암으로 죽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지독한 통증이 머릿속을 가득채우고 혈관과 신경을 따라 퍼져나갔다.
지독한 아픔에 심장마저 멎었을까?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숨이 막히고 답답한데도 망할놈의 죽음은 끝날 생각을 않는다. 아 이제 두개골 중간쯤 온건가? 온 몸이 타들어가는 듯 아프기 그지 없다.
 
젠장! 젠장! 젠장! 괜찮아! 그래도 계약은 파기다! 이걸로 끝났어!’
 
그토록 바라던 계약 파기로 위안을 삼아보려하지만 당장의 고통 앞에 당해낼 장사는 없다. 나는 연신 비명을 질러대며 자지러졌다.
 
 
길고도 긴... 99년의 인생만큼이나 긴 죽음이었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겁다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곧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몸을 속박하던 것들이 사라지며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다. 마치 우주공간을 유영하듯 한 없는 자유가 느껴졌다.
그리고 내 눈에 누워있는 또 다른 내가 보였다.
 
드디어... 죽었다.”
 
놀라운 감흥이었다. 하지만 마냥 감상만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확인해야 했다. 내가 정확히 그 빌어먹을 계약을 파기시켰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향년 99, 36423시간 5959... 게다가 날 이꼴로? 빌어먹을 영감 같으니...”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놈이 있었다. 악마... 피를 흘리고는 있었지만 검은 몸뚱이와 흉측한 털, 모두 조금 전 본 그대로였다.
 
흐이익! ...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걱정마 해코지 할 생각은 없으니까.”
괜찮은가? 아파보이는군...”
흐흐흐... 걱정이라도 해주는건가? 크크 인간의 몸을 잠시 빌린 덕분에 내 몸도 이꼴이 됐지... 아마 악마로서의 나는 곧 소멸될거야. 그게 아니라도 다른 인간들에게 내 정체를 내보인 이상 혹독한 처벌은 피할 수 없지... 아아... 참 길고 긴 시간이었어. 하지만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지...”
... 계약은... 우리의 계약은 어찌 됐나?”
축하해. 조금 전 말 한 대로야. 1초를 남기고 계약은 파기됐어, 즉 당신의 승리지.”
오오... 주여... 제가 드디어... 죽었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악마로서 살아온지 수백년도 더 됐지만 당신같이 질긴 인간은 처음이야.”
 
악마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 99년의 인생을 매듭지을 때의 나도 그랬다. 하물며 수백년의 세월을 살아온 악마라면 그 회한(悔恨)의 감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기 오는 군...”
 
그 순간 창문 너머에서 밝은 빛이 내려왔다. 그리고 그 빛줄기 사이로 하얗고 찬란한 날개를 가진 누군가가 보였다.
천사... 물을 필요도 없었다. 온몸이 흉측한 검은색의 털로 뒤덮인 악마와 비교하니 그 존재는 더할나위 없이 명확했다. 눈물이 흘렀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길고 긴 사투를 끝낸 자에게 찾아온 마지막 보상, 운명은 나로 하여금 자살이 아닌 타살로 생을 마감짓게 했다.
결국 나는 승리한 것이다.
 
친절하게 마중까지 나오다니... 역시 천국이군...”
 
악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기쁨과 환희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와는 완전히 상반된 표정이었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미안하게 됐네... 이제 헤어질 시간이구만... 그래도 자네에겐 감사하는 마음도 조금 있어. 덕분에 긴 시간... 아플 걱정 없이 잘 살았으니까. 내 천국에 가서도 종종 자네 생각 함세... 허허허
 
좌절한 악마에겐 미안하지만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악마는 그런 나를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통때문인지 아니면 상처때문인지 시커먼 털들이 천국의 빛을 받아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마치 탈모 노인의 머리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악마도 죽기 전엔... 탈모가? 이런... 불쌍하기도 하지...’
 
그때 악마가 빛을 향해 다가섰다. 무수히 날리던 털은 천국의 빛에 닿자 소멸했고, 몸뚱이의 거무죽죽한 피부도 빛을 머금자 바래져 갔다. 나는 그것이 악마의 소멸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몸, 살아도 지옥의 형벌을 맞봐야 하는 측은한 몸, 악마도 삶을 포기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헌데 조금 이상했다.
빛을 머금은 악마의 몸이 어느 순간 번쩍이더니 이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찬란하고 아름다운 형언할 수 없는 오색영롱한 색으로...
 
... 뭐 뭐야?”
 
악마가 뿜어낸 빛은 점점 더 강해지더니 이내 눈을 뜰 수 없을만큼 강해졌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말했잤수... 마중을 나왔다고...”
... 무슨 소리야?”
 
당혹스러웠다.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 치고는 너무도 평온했다. 내가 상상하던 악마의 마지막은 이런게 아니었다. 욕을 하거나 최소한 저주라도 퍼부으며 울부짖어야 했다. 그런데 차츰 변해가는 그의 마지막은 흡사 천사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사실 나도 좀 지겹기는 했거든요.”
뭐라는거야?”
당신도 100년이나 살아봤으니 알꺼 아니오. 수백년... 지독히도 긴 시간이죠. 게다가 우리쪽은 근무 여건도 그닥 좋지가 않아요. 악마 하나당 커버해야하는 인간 숫자도 엄청나고, 복지나 대가도 형편 없죠. 툭하면 시간외 근무에... 게다가 최근엔 악마 평가 항목에 인터넷 지표까지 포함되서 퇴근 후에도 틈틈이 악플을 달아줘야 했거든요. 정말이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요.”
?”
그러던 차에 동종 업계에서 이직 권유가 들어온 거유. 그것도 업계 최고 대우를 자랑하는 그 쪽에서... 구미가 당기겠수 아니겠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괜시리 영혼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 무슨 말을 하고싶은 게야? ... 말해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을 살리려고 고분분투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답디다. 최근엔 세상에 선한 사람도 적은데, 악마 주제에 살신성인하는 모습에 좋은 점수를 주었다나? 뭐 이직자가 생기면 지옥 쪽도 좀 술렁일 테니 그에 따른 홍보효과도 감안했겠지. 그래도 전직이 전직인 만큼 그 쪽 윗대가리들은 조금 고민이 되긴 했나봐. 약간 망설이고 있던 차에...”
으으...”
마지막 순간, 저기 홍순철 경사란 양반이 당신에게 총을 쏜 거야. 나로선 뭐... 당신이 예뻐서 그런건 아니지만, 당신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졌지. ! 그게 결정타였네?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던질 수 있다니... 방금 그 쪽 윗 선에서도 결재가 났답니다. 이직을 허용키로. 그러니 뭐 나야 거절할 이유가 있겠수?”
... 말도 안돼... ... 거짓말 마! 저건 분명 나를 데리러... 으으윽!”
 
놀라운 광경이었다. 갑자기 악마의 등이 찢어졌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고 찢어진 살갗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내 소멸됐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광경은 그 다음 부터였다. 찢어진 악마의 등, 그 곳에서 하얗고 커다란 날개가 돋아났다. 빠른 속도로 커져간 그것은 이내 앙상한 뼈 위에 살을 돋우더니 곧 순백의 깃털들이 자라났다.
그리곤 크게 펄럭였다.
 
아아아...”
 
거대한 풍압이 나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 웅대하고 찬란한 광경에 입이 벌어져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천사... 그는 천사로 탈바꿈해 나를 보았다.
 
애초에... 악마와 계약을 했으며, 죄없는 간호사를 향해 총을 쏴 놓고도 천국에 갈 줄 아셨던 건 아니죠?”
... ... 계약은 파기됐어.”
파기는 됐지만 헛된 욕심의 방증이죠.”
... 간호사가 아니었어. 너였어. ! 악마!”
악마긴 하지만 살의를 불태우며 고통을 주려는 의도는 분명 있었죠.”
... 그래도 그... 그것 뿐이야.”
처음 자살 시도하시려고 전철에 뛰어들었던 거 기억하시죠? 그때 당신을 보고 놀란 기관사... 지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답니다. 일도 못하고... 가족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네요. 기관사의 큰 아들은 매일 같이 신문기사를 곱씹으며 당신을 저주하고 있군요. 물론 발을 헛디딘 노인 A를 구한 용감한 시민 B에게 감사하면서요.”
... 그런...”
... 자살 까페에서 혁혁한 활동을 해오신 부분도 참작이 됐을 겁니다. 당신이 별 생각 없이 올린 게시물이나 달아놓은 댓글들... 별것 아닌 거 같지만 누군가에겐 자살의 원동력이자 시발점이 돼기도 했군요. 축하해요. 대여섯명은 족히 보내셨어요.”
... 아니야...”
전 이만 갑니다. 천국에 가서도 종종 당신을 생각하겠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죄로 참혹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던 제가 당신 덕분에 새 인생을 살게 됐으니까요. 그것도 천국에서...”
으아아아아!”
 
악마가... 아니 천사가 떠올랐다. 커다란 날개짓과 함께 뿜어져나온 빛의 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곤 천천히 멀어진다.
영원의 안식을 찾아...
 
잠깐 기다려! 그럼 난... 난 어떻게 되는거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내겐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러자 그가 잠시 멈춰 내게 말했다.
 
벌써 와 있습니다. 그가 당신의 길을 인도 할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자정에 단 1초를 남겨둔 시간, 그 어둠 속에 나를 남겨둔 채, 영원히 떠나버렸다.
그리고 난 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친숙한(?) 동반자를 맞이했다.
 
아이고... [99살까지만살고싶다]님 저희가 이렇게 또 만나뵙게 되네요. 반갑습니다.”
... 당신은... 설마!”
네 맞습니다. 제 목소리 기억하시죠? 자기모 까페 운영자 [자살은나의힘]입니다. 하하핫! 살다보니 이렇게 또 회원님을 만나네요. 갑작스런 이직사건으로 자살진흥과에 있던 제가 이번에 계약유치과로 인사이동을 하게 됐습니다. 자 그럼 가실까요?”
히익... ... 난 어찌되는게요?”
? 계약은 파기 됐지만 앞서 들으신 바 대로... 잠깐 발을 좀 담그셔야죠?”
.. 잠깐... ... 그래도 다행이구만...”
글쎄요 다행일까요? 생각하시는 것 보단 꽤 긴 시간이 될 겁니다. 영원이라는 시간보다는 짧으니 잠깐이라 말 했을 뿐이니까요.”
... 그래도 영원이 아닌게 어딘가!”
흐음... 그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한데... 혹 군대를 다녀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군대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
통상 제대를 수개월 남긴 고참이 상병 실세와 이등병을 두고 장난칠 때 하는 말입죠. ‘너 쟤한테 어정쩡하게 갈굼당하면서 1년정도 지낼래? 아님 나한테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친 듯이 갈굼당하는 3개월을 보낼래?”
... 그게 대체 무슨...”
계약 파기하시려고 그 난리를 치시고, 거기에 악마를 천국으로 이직? 아까 들으셨죠? 악마 개인당 업무량이 엄청나다고... 근데 회원님께서 그 중 한 명을 보내신 겁니다. 일을 나눠야 하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있죠. 불만이 장난이 아닐 겁니다. 게다가 악마의 이직은 꽤 심각한 이적행위입니다. 체제 전복을 우려하신 상급 악마님께서도 벼르고 계신다더군요. 흔히 생각하시는 지옥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저주스런 시간을 보내게 해주겠다나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물론 영감님의 영혼이 그 인고의 시간을 버텨 낼거라곤 생각 않지만요. 골수의 한 점까지 타들어가다 끝없이 소멸된다. 뭐 대충 그 정돕니다. 하하하 자 갑시다. 바쁩니다. 바빠! 저 이거 끝내고 세월호 관련 악플 달러 가야 되요. 지옥도 성과연봉제로 바뀐 거 아세요? 그거 말이 성과연봉제지 성과 퇴출제라니까요! 파업이라도 해야하나?”
아아아 안돼!”
 
 
자랑스럽게 사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자랑스럽게 죽어야 한다.’
- 니체 -
 
<>


출처 나.
세월호를 잊지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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