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광안리. 신한은행 08-09프로리그 결승. 매치업, 공군ACE 대 SKT1.
기인- 백사장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늘어선 사람들의 끓는 핏속으로 아드레날린이 한소끔 풀어진다. 환호하는 이, 악을 쓰는 이. 십만 인파들의 눈이 향한 끝 스크린 안으로는 스웜이 퍼지고 사방천지에서 저글링이 몰려든다. 갇힌 마린은 오갈 데를 모른다. 어디를 둘러봐도 누렇게 뜬 스웜뿐이다.
"저 저글링! 저 저글링이 감히 누구의 저글링입니까!"
엄재경의 고함이 좌중을 가르는 가운데 정명훈의 얼굴에는 이미 핏기가 가신다.
"물론 정명훈! 대저그전 요즘 나아졌습니다! 많이 좋아졌어요! 하지만 이 선수 상대로는 택도 없습니다!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이 선수 상대로는 기량이 절정에 달해야 해요!"
"0809시즌 대테란전 승률 78%! 11연승 째! 잡을 테란이 없습니다, 다 죽었어요!"
"동점입니다! 드디어 동점을 만듭니다! 드디어 공군이! SK T1을 ACE 결정전까지 끌고――"
마린의 비명이 타임머신 밖, 저 드넓은 광안리까지 울려퍼진다. 도망치려던 샛길로 다시 스웜이 펼쳐진다. 위아래에선 동시에 저글링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주저앉는 병력을 앞두고 정명훈은 기어이 마우스에서 손을 떼었다. 고개를 숙이는 그는 말이 없었다. 이윽고 GG.
"마침내 홍진호가!"
자리를 박차며 엄전김이 절규하는 가운데 승자가 일어선다.
"홍진호가 공군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거죠!"
현존 최강의 저그, 폭풍 홍진호가.
타임머신을 열고 나온 그는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밑에서 멍하니 밑을 내려보았다. 천지가 진동하는 함성이 귀를 울린다. 세트 스코어 3:3. 먹먹한 가슴이 한바탕 긴 질주를 마친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십만 관중의 터질 듯한 박동과 아우성이 한 데 뒤범벅이 되어 이편을 덮쳤다.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저 많은, 저 우렁찬 함성들!
홍진호!
홍진호!
홍진호!
이름을 불린 그 대단한 남자는 저 먼 관중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렸다. 목이 메어 채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홍진호는 구호를 뱉는다. 필! 승!
고인규를 잡아냈던 박정석이 저편에서 뛰쳐나온다. 김택용을 무릎 꿇린 차재욱이 가슴 벅차게 진호를 끌어안는다. 임요환에게 아깝게 져버린 오영종도, 도재욱과 엘리전 끝에 패배의 쓴 잔을 마신 한동욱도, 박재혁과 혈투를 벌이다 패한 이주영도 홍진호를 덮쳐 얼싸안았다.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테란으로 홍진호 이기려면 생더블! 초반 피해 아무것도 없이! 홍진호는 선풀 짓고 시작하고! 그러면 이길 가능성이 한! 한 30% 쯤 되는 겁니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버린 엄재경은 연신 각혈처럼 소리를 쳤다.
"그런 존재입니다! 대테란전에서 홍진호는 그런 존재에요! 홍진호가 잠시 주춤하던 시간동안 황신! 우스갯소리로 불렀던 그 별명대로 정말 홍진호는 신입니다! 사람이 테란으로 홍진호 이기려면 자기가 생더블에 홍진호가 선풀 지어줘야 그나마 공정한 거죠!"
"아―― 정말 홍진호 선수, 너무나, 너무나 강력――"
무슨 말을 더 하려던 김태형의 말을 막고 쿠웅! 포성이 울렸다. 공군에서 특별히 대절한 105mm 예포가 세 번째로 불을 뿜었다. 특별히 관람을 허락받은 공군 장병들, 자리에 앉은 장교단은 박수를 치고 힘껏 환호를 했다. 일렬서 떨쳐 일어난 의장대는 악기를 들었다. 승전행진곡이 폭풍처럼 일제히! 우렁차게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홍진호는 떨리는 가슴으로 저편 T1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축 늘어져 들어가는 정명훈 뒤로 최연성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 임요환이 있다.
"괜찮아."
마른 침을 삼키며 최연성은 그렇게 그의 제자를 다독거렸다.
"괜찮고말고. 어디 진호 형 이기는 게 쉬운 일이냐?"
"죄송합니다, 코치님……"
"글쎄 괜찮다니까 그러네."
명훈은 풀이 죽여 고개를 숙이고, 연성은 애써 웃어보였다. 가슴이 막막하다. 이곳은 광안리, 한때 제국 T1이 제패했던 왕토[王土]. 이제 누가 나가야 이 절망적인 전황을 타파할 수 있을까. 저만치 의자에 앉은 박용운 감독은 얼이 빠진 얼굴로 저 위 텅 빈 무대를 올려보고, 임요환은 아직 말이 없었다.
"그러면 누가 나가겠습니까!"
전용준이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ACE 결정전! 공군은 홍진호입니다! 무조건 홍진호입니다! 그러면 T1은!"
"예, 예, 카드 있죠. T1이라고 홍진호 잡을 카드 없는 거 아닙니다! 임요환 있습니다!"
말을 받은 엄재경은 흥분으로 떨리는 제 손을 확인하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웃음에 고함을 섞어가며 그는 또 포장을 시작하려고 어휘를 골랐다. 임진록. 꿈에도 그려오던 그 이름.
"그렇죠! 임요환 나와야죠! 테란의 재앙이 홍진호라면 임요환 역시 저그의 재앙 아닙니까!?"
"김택용 선수, 물론 잘하죠! 그런데 김택용도 프로토스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홍진호에요!"
"네, 말씀드리는 순간 홍진호 선수―― 무대 가운데로 와서――"
무대를 걸어 홍진호는 제국 T1의 본진을 다가왔다. 딱 이쪽과 서로를 마주볼 거리만큼만 와서, 그는 손가락을 들어 임요환을 가리켰다. 삿대질을 당한 요환의 표정이 굳고 거꾸로 홍진호는 웃었다. 탄성이 일었다.
"그렇습니다!"
엄재경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탄식한다.
"임진록 한 번 치르자는 거죠!"
이제 십만 관중은 임요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임요환의 0809시즌 대저그전 승률 82%! 스타리그 4강 진출! 기량을 회복한 이윤열조차 혀를 내두르는 대저그전의 스페셜리스트! T1의 황제! 갖가지 어휘를 희롱하며 황제를 찬양하는 엄재경의 수작질을 들으면서도 임요환은 이를 악물었다. 광안리는 미친듯이 임요환을 연호한다. T1의 팬들은 그들의 구원자를 부르고, 공군의 팬들 역시 맞수를 찾아 고함쳤다.
임요환!
임요환!
임요환!
광안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호명을 외면하고, 임요환은 무심하게 박용운을 돌아보았다.
"명훈이 내보내시죠."
씹어뱉는 그의 말이 사형선고만큼이나 무서웠다. 최연성은 숨을 삼키고, 정명훈은 다리에 힘이 풀려 푹 의자에 앉았다. 박용운 감독의 얼굴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야, 요환아……"
"명훈이도 진호 충분히 잡을 수 있습니다. 명훈아, 할 수 있지?"
"형, 방금 깨진 애 억지로 세워다가 뭘 어쩌려고――"
"연성아, 나 지금 명훈이한테 물었다."
황제의 나직한 입막음에 괴물은 이윽고 입술을 깨물었다. 폐하께옵선 이내 정명훈을 돌아보았다. 시퍼런 눈빛을 마주보던 명훈은 떨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 홍진호 선수 못 잡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고백을 애써 하는데도 임요환은 냉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너 잡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나가."
"저 저그전 자신 없어요!"
"티원테란이 왜 저그전이 자신 없어 이 병신새끼야!"
머리를 때리는 사자후에 정명훈은 왈칵 울음을 삼켰다. 임요환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당장 나가. 나가서 이기고 돌아와. 정명훈은 대답지 않았다. 그저 한 번, 원망스러운 눈으로 까마득한 대선배를 노려보고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괜찮겠어?"
못내 불안해서 되묻는 박용운 감독의 배려에도 정명훈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은 푹 한숨을 쉬고, 이내 종이에 정명훈의 이름을 휘갈겼다.
이윽고 임요환을 대신하여 정명훈이 무대에 올랐다.
광안리에는 아쉬움과 체념의 아우성이 휩쓸었다. 홍진호는 한 번 멀리 임요환을 노려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요환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꾹 아쉬움과 열정을 속으로 눌러 삼키는 와중, 곁에 앉은 최연성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못 이겨. 6경기서 이겼으면 모를까, 지금은 가망이 없어."
"명색이 티원테란이다."
"쟤 저그전 아직 완성 안 된 거, 형 정말 몰라서 그래?"
타박하는 최연성을 외면한 채 임요환은 턱을 괴어 저편을 올려보았다.
"아직이면 완성될 가망은 있다는 거지?"
엉뚱한 물음에 최연성은 또 웃는다.
"다음에도 광안리 오면 말이지, 한창 물이 올라 있을 거야. 그 때쯤엔."
"어차피 지는 싸움이야. 내가 나가도 그렇고, 코새―― 아니, 택용이가 나가도 가망 없고."
진호 기세가 너무 올랐어. 그 한마디를 씹어뱉고 임요환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저만치서 난감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던 김택용도 이윽고 주저앉고, 최연성은 초탈한 것처럼 의자에 누웠다. 광안리 하늘에는 끝도 없는 서치라이트가 올라 먹구름낀 하늘을 희롱했다. 여름밤답지 않게 바람이 차고 강하다. 바야흐로 광안리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결국 T1은 패배했다. 공군은 광안리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나부끼는 공군 ACE의 깃발이 백사장 한가운데에 꽂혔다. 자리를 함께한 공군참모총장은 유성렬 중위를 비롯한 선수들과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며 공을 치하했다. 프로리그 최약팀에서 우승까지 도약해온 긴 1년이 끝나는 순간, 선수들은 하나같이 울먹거렸다. 트로피를 들어올린 MVP 홍진호는 젖은 눈으로도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더 높은 곳에서 울겠습니다."
왕왕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아우성에 홍진호는 그렇게 대답했다.
퇴장하는 가운데서 임요환을 설핏 홍진호를 돌아보았다. 나가면서 그도 단 한 마디를 곱씹었다. 더 높은 곳에서. 팀의 이름이 아닌 오로지 우리 중 한 사람의 이름으로 남을, 보다 위대한 우승컵을 사이에 두고 싸워야 할 더 높은 곳에서.
다음날, T1의 숙소는 비었다.
프로리그가 끝나자 팀은 오랜만의 휴식에 돌입했다. 김택용의 제안으로 이번 휴양지는 푸켓이 되었다. 개인리그를 치러야 하는 단 세 사람만 남고 T1 선수들은 푸켓으로 향했다. 어차피 양대리그는 각각 4강에 돌입했고, 경기를 준비할 선수들은 온 스타판을 통틀어서 여덟 명밖에 남지 않은 채였다.
그중에서도 T1에서 남은 사람은 프로토스 하나와 테란 둘 뿐이었다. 우선 김택용이 있었다. MSL 4강에서 마재윤과 한판대결을 벌이게 될 그는 전에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푸켓을 가길 제안해놓고도 정작 그는 정작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연습에 매진해야 했다. 다시 프로토스의 재앙이 되어 돌아온 마재윤은 2007년 3월 3일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스타리그 4강에서 맞붙을 두 사람이 더 있다. 임요환과 정명훈은, 이제는 첫 팀킬잔혹사를 벌일 차례였다.
다시 사흘이 지났다. 용산 이스포츠 센터 대기실에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네가――"
먼저 입을 연 건 임요환이었다.
"명훈이 네가 91년생이었지?"
"예."
"이제 열아홉 살이네?"
"예."
맥없이 대꾸하는 정명훈에게 임요환은 한숨을 쉬었다. 어린 친구들이 꽉 잡고 있는 게 이 스타판이란 동네다. 80년생의 백전노장은 고작 서른 줄에 들자마자 부쩍 나이가 들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열아홉 살. 아찔하도록 멀게 느껴지는 나이다. 난 저 나이 때 무얼 했더라.
"반대편 4강전에선 진호가 올라올 거 같다."
"영호는요?"
"영호, 그래, 영호 잘하지. 그런데 진호가 기세가 너무 올랐어. 영호가 막아내기 버거울걸?"
정명훈은 입을 다물었다. 임요환도 잠시 눈을 감고 의자에 누웠다. 이제 홍진호가 뽑아든 칼날은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결승에 올라가면, 어떻게, 진호 이길 자신 있냐?"
대답도 못하고 정명훈은 꾹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명훈아. 봐줄까 싶었는데 안 되겠다. 내가 올라가마."
정명훈은 울컥 임요환을 마주보았다. 이것 봐라 싶었다. 정말 아찔한 오만함이다. 아량을 베풀어 봐 줄 수도 있었다는 저 자신감이 더할 나위 없이 얄밉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서 더욱이. 0809시즌 임요환의 테테전 승률은 69%. 서지훈이나 이영호만큼의 미친 기량은 아니더라도, 그 우수한 승률에 더하여 이정도 자신감이면 듣는 사람으로서는 소름이 오싹할 밖에 없다.
"거기다, 내가 천년만년 해먹을 것도 아니고 다시 네가 우리 팀 에이스 될 텐데,"
"또 부활하시겠죠?"
"힘들어서 더 못해먹겠다. 이번엔 진호 콩라인으로 남겨두려고 나도 좀 분발해보는 거야."
말끝으로 그는 얼른 정명훈의 머리칼을 헤집어 놓았다.
"이젠 네가 T1 책임져야지. 별명도 국본[國本]이라며?"
국본. 오랜만에도 듣는 그 이름에 비로소 정명훈은 헤죽 웃고 말았다. 별로 좋아하는 별명은 아니었지만 황제 본인으로부터 직접 듣는 국본이란 칭호는 각별한 느낌이 있었다. 마치 얼른 왕위를 물려주려는 노왕처럼 임요환은 애정을 담뿍 담아 그의 후배를 얼렀다.
"너도 명색이 티원테란이다. 저그전 곧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이번엔요?"
"아직 아냐. 이번에 네가 올라갔다가 덜컥 진호가 우승이라도 하면, 그땐 준우승라인 이름이 콩라인이 아니라 정명훈라인 돼버릴 걸? 줄이면 훈라인. 어감이 별로잖아."
말끝으로 그들은 체신없이 키득거렸다.
열아홉과 서른. 두 남자가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루어야 할 시간이 촌각으로 다가온다. 열아홉이라는 나이를 입 안으로 되뇌다가 이윽고 임요환은 웃었다. 열아홉이면 벌써 어른이고 어엿한 사나이다. 봐준다는 수작은, 물론 농담이었지만 하면 안 될 수작이었다.
"잘 하자."
"네."
둘은 툭, 주먹을 부딪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에선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와 국본을 번갈아 연호하는 소리들. 문을 열자 그와 T1의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서른의 황제께옵선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깊이 숨을 머금었다. 처음 책봉을 받았던 그 자리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이곳은 스타리그,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 까마득한 후배의 경외 어린 반란을 제압해야 할 때가 왔다. 자리에 앉은 그는 다시 숨을 골랐다. 칼을 뽑아들었다. 혈전이 시작되었다.
황제는 군림하고, 통치하며, 또한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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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쯤에 "스타크래프트; 그 치열한 전쟁의 역사" 썼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해 드리고자 다시 본격 스덕 팬픽션을 연재합니다. 사골처럼 우려먹으면서 여기저기 살이 붙어 떠돌던 스갤폭발 시나리오의 소설판입니다. 총 네 편으로 연재됩니다.
01.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
02. 마에스트로
03. [이윤열 에피소드인데 아직 제목은 정하지 못했습니다]
04. 폭풍의 땅
한 번 스갤폭발 시나리오의 끝장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