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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 그녀의 우편번호
오늘 아침 내가 띄운 봉함엽서에는
손으로 박아 쓴 당신의 주소
당신의 하늘 끝자락에 우편번호가 적혀 있다
길 없어도 그리움 찾아가는
내 사랑의 우편번호
소인이 마르지 않은 하늘 끝자락을 물고
새가 날고 있다
새야, 지워진 길 위에
길을 내며 가는 새야
간밤에 혀끝에 굴리던 간절한 말
그립다, 보고 싶다
뒤척이던 한마디 말
오늘 아침 내가 띄운 겉봉의 주소
바람 불고 눈 날리는 그 하늘가에
당신의 우편번호가 적혀 있다
나는 오늘도 편지를 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
수신인의 이름을 또렷이 쓴다
어 머 니
새야
하늘의 이편과 저편을 잇는 새야
사람과 사람 사이
그 막힌 하늘 길 위에
오작교를 놓는 새야
오늘밤 나는 그녀의 답신을 받았다
흰 치마 흰 고무신을 신으시고
보름달로 찾아오신
그녀의 달빛 편지
나는 그녀의 우편번호를
잊은 적이 없다
신석정, 빙하(氷河)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수(水)
평(平)
선(線)
너머로 꿈 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부서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 년 지구와 주고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면사포(面紗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소리와
뚝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대어 몇 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 다 우리 상처 입은 옷자락을
갈가리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화상(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 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심장(心臟)도 빙하(氷河) 되어
남은 피 한 천 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박철, 우수파(憂愁派) 선언
햇볕 좋은 날 정발산동 두루미공원 길을 가다가
동네 비스듬히 기울어져 가는 집을 하나 보았다
무슨 박물관이라 썼는데 문패가 희미하다
집 자체가 하나의 기울어져 가는 골동품이었다
몸을 털며 들어서니 창문으로 밀려오는 갈 햇살에
마룻바닥이 가쁜 숨을 쉰다
그러나 반가운 눈치다
3호방 문 앞에 긴호랑거미 그물이 흥건하고
유리벽 안에 걸린 진열품이 나란히 손을 잡고 서 있다
'우수'며 '고뇌'며 그 옆에 '방황'이었다
객은 아득한 현기증에 창밖을 보았다
박서원, 문으로 가는 길
적막
모든 육신의 뚜껑을 열고
모든 소리를 들어야 하리
나뭇잎 세포가 시들어 가는
떨림까지도
말갈퀴는 고요히 눈보라치고
마부는 눈이 멀어
마을로 가는 입구는 넓다
이 모두를 잿더미로 끌어안고
적막
모든 목소리를 들어야 하리
구석본, 떠돌이별
혼자였습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도시에서 오직 혼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빛나는 것들은 유리벽 밖에서 몸짓만 보내며
그들의 자리에서 번쩍이는 어둠으로 남아
이 도시의 풍경이 되고 있습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밖에서 빛나던 것들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도시의 한가운데로 침몰합니다
침몰하는 그들을 향하여 소리 지르면
그리움의 근원이 무너지고
하늘에서 절망적인 외로움이
우루루 우루루 내려와
엘리베이터의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보이지 않는 끈에 매달려
캄캄한 하늘로 올라가는 나는
이 도시의 이름 없는
떠돌이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