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장이지, 서정의 장소
그것은 수구초심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껑더리된 늙은 여우가
짓무른 눈으로 가시밭길을 더듬어
난 곳을 찾아가는 것은
향수 그 이상의 마음입니다
어미의 털이, 형제의 털이 아직 남아 있는 굴
시르죽은 여우가 거기서 몸을 말고 누워
죽는 것은, 깨어나지 않는 것은
그곳이 태아의 잠으로 이어진 곳인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몰라서
천지간에 살아보기로 한
태아의 기억으로 가서
이제 살아보았으니까
비록 모두의 답은 아니고 '나'만의 이야기겠지만
그 대답을 하러 가기 위해
여우는 발이 부르트게 걸었을 것입니다
숨을 잃은 털 위로
희미한 빛과 바람의 화학이 내려앉고
그래도 잊지 못하는 마음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만나야 하는
일생의 사건사고를 향해
삼원색 프리즘의 날개를 펼 때
문득 바라본 저녁 하늘의 붉은 빛과
쉼도 없이 흐르는 검푸른 강
초록빛 꿈을 꾸고 있는 숲
정념과 회한과 꿈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거기 보태어져 더 아름다워지는
畢生의 마지막이 있음을
여우의 마음은 알았을 것입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있음을
주용일, 얼음 대적광전
계곡으로 물고기 잡으러 따라 나섰다가
깨진 얼음장 속에 꽁꽁 얼어 있는 물고기를 보았다
물이 서서히 얼어오자 막다른 길목에서
물고기는 제 피와 살을 버리고
투명한 얼음 속에 화석처럼 박혔다
귀 기울여도 심장 뛰는 기척이 없다
조식(調息)을 하는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랑하면 사랑에 목숨 묻기도 하듯이
물속에 살기 위해선
얼음이 되는 것 두려워 말아야 한다
이글루 짓고 들어앉은 에스키모처럼
은빛 지느러미 접고 아가미 닫고
사방 얼음벽 둘러친 무문(無門)의 집에서
물고기는 다시 올 봄을 아예 잊었다
얼음장이 그대로 고요한 대적광전이 되었다
박철, 가슴엔 리본을 달고
아이의 가슴에 예쁜 리본을 달아주고
들판에 나가 마음대로 뛰놀게 한다
저쪽에서 구름이 밀려와 이쪽으로 가고
구름 사이로 하늘도 밀려가고
아이는 논둑길을 넘나들다 이내
나의 곁에 와 앉는다
가을걷이 일찍 끝난 빈 들판에
따뜻한 초겨울의 맑은 날씨만 남고
작은 바람에 아이의 리본이 흔들린다
30년이 되었구나
그땐 무엇이 나의 가슴에서
저렇게 예쁜 모습으로 흔들렸을까
아버지도 나의 가슴에 무언가를 달아주고
저기로 가 마음대로 놀아라
논둑에 앉아 먼 하늘가로 이렇게
긴 한숨만 내쉬었을 텐데
구름 가는 사이
30년이 지났구나
이영광, 직선 위에서 떨다
고운사 가는 길
산철쭉 만발한 벼랑 끝을
외나무다리 하나 건너간다
수정할 수 없는
직선이다
너무 단호하여 나를 꿰뚫었던 길
이 먼 곳까지
꼿꼿이 물러나와
물 불어 계곡 험한 날
더 먼 곳으로 사람을 건네주고 있다
잡목 숲에 긁힌 한 인생을
엎드려 받아주고 있다
문득, 발밑의 격랑을 보면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 않는 직선도 없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누군가 이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거다
이병금, 가랑잎처럼
마음자리 비탈지는 쪽으로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움직거리며 물결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나 마침내 죽음마저도
눈물의 고운 실타래에 되감겨야 함을
스치우는 가랑잎 앞에서 비로소 알겠다
오늘처럼 집을 찾아 헤매이는 바람저녁
나 또한 누군가의 따뜻한 집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아
흰 구름 떠가는 가랑잎의 하늘길을 따라
마음자락을 끝없이 펼쳐 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