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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고니의 시작(詩作)
고니 떼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그 꽁무니에 물결이 여럿 올올이
고니 떼를 따라가고 있다
가만, 물결이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다
강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수면의 검은 화선지 위에
고니 떼가 붓으로 뭔가를 쓰고 있는 것
붓을 들어 뭔가를 쓰고 있지만
웬일인지 썼다가 고요히 지워 버리고
또 몇 문장 썼다가 지우고 있는 것이다
저 문장은 구차한 형식도 뭣도 없으니
대저 만필(漫筆)이라 해야 할 듯
애써 무릎 꿇고 먹을 갈지 않고
손가락 끝에 먹물 한 점 묻히지 않는
평생을 쓰고 또 써도 죽을 때까지
얇은 서책 한 권 내지 않는 저 고니 떼
이 먼 남쪽 만경강 하구까지 날아와서
물 위에 뜻 모를 글자를 적는 심사를
나는 사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쓰고 또 쓰는 힘으로
고니 떼가 과아니, 과아니, 하며
한꺼번에 붓대를 들고 날아오르고 있다
허공에도 울음을 적는 저 넘치는 필력을
나는 어찌 좀 배워야하지 않겠는가
김현성, 슬픔에게
슬픔이 오면
내 반갑게 맞으리
고단한 기억을 헤아리며
양지바른 길목이 아니어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한순배 도는 저녁을 위해
슬픔과 동거한 기쁨을 위해
사랑의 날들은 많지 않으리
내 뜨거운 눈물 있음을
슬픔에게 보여주리
그 쓰린 어깨를 안아주리
홍영철, 겨울 숲은 따뜻하다
겨울 숲은 뜻밖에도 따뜻하다
검은 나무들이 어깨를 맞대고 말없이 늘어서 있고
쉬지 않고 떠들며 부서지던 물들은 얼어붙어 있다
깨어지다가 멈춘 돌멩이
썩어지다가 멈춘 낙엽이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시간을 붙들어놓고 있다
지금 세상은 불빛 아래에서도 낡아가리라
발이 시리거든 겨울 숲으로 가라
흐르다가 문득 정지하고 싶은 그때
배창환, 아름다움에 대하여
눈 덮힌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19년만에 불모의 땅 대구 일원에 내린 눈도
역시 아름다웠다
기차를 타고 내려올수록
세상을 더 깊고 두껍게 덮어오는
하얀 눈발
아무 것도 용서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평등하게 겹겹이 덮어버리는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손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세상에서
발자욱을 찍어내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전에는 사람이란 그저 작고 추하기만 한 줄 알았다
나이 먹어 불혹에 한 발 다가선 지금
내게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이 더 깊이 이해된다
핍박받는 사람이 핍박을 이겨내려고 싸우면서도
가장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이
그걸 나는 조금씩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눈 내리는 세상만큼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한 것이고
태어나길 잘 했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 때가 있다
이재훈, 재킷을 입은 시인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고독한 오만으로 공허한 시를 쓴다
재주 좋은 시인은
높은 나무에 올라 나뭇잎의 형상을 그린다
시든 나뭇가지의 슬픔을 노래한다
재킷을 입고 사를 쓴다
사로잡힌 유니콘의 뿔에 대해
사랑하는 말발굽 소리에 대해
문명인의 실험에 훼손당한 별의 슬픔에 대해
스삭스삭 재킷의 말로 쓴다
실상 외투는 어머니의 살로 만들어진 것
재킷, 재킷! 하면 어머니의 뇌와 심장이 실이 되어
올올이 풀려나온다
재킷을 입고 추위를 견딘 나는
어머니에 대해 쓸 수 없다
잠자는 숲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재킷을 태우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태어날 텐데
재킷의 재가 나무에 뿌려져
울창한 숲이 되면
앙상한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길 텐데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너무 추워 재킷을 꼭 껴입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재킷, 재킷 말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