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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난초꽃
마루에서 동화책 읽고 있던 나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할아버지는
무슨 보물이라도 보여주려는 듯
창문에 늘어진 속 커튼을 젖혔다
창턱에는 난초 화분이 네 개
그 가운데 하나가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하얀 줄기에 샛노란 꽃잎
난초꽃 향기가 그윽하지 않으냐
난초가 들으면 안 되는
무슨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말했다
화분에 심은 풀잎처럼 보이는 난초에
흥미 없는 손자 녀석은 시큰둥하게
힐끗 쳐다보고
별것 아니라는 듯
횅하니 거실로 되돌아가 멈추었던
컴퓨터 게임을 계속했다
작은 손가락이 나는 듯 움직였다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옛날의 손자는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녀석이 나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문정희, 우울증
겨울 안개 길고 긴 터널
모든 것이 무사해서 미친 중년의 오후
전조등 하나 없는 회색 속을 걸어간다
가방에는 몇 개의 열쇠가 들어 있지만
진실로 갖고 싶은 열쇠는 없다
기적이란 신의 소유만은 아니었구나
지나온 하루하루가 모두 기적이었다
돌아보니 텅 빈 무대 아래
반수면 상태로 끝없이 삐걱이는 의자들
저기가 진정 내가 지나온 봄의 정원이었던가
송종찬, 폭탄주
한 생이 또 한 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섞이지 못하는 맥주와
양주처럼 처연하여
오늘 밤
건너가고 싶네
가슴속에 불을 질러
한 생이 또 한 생에
잠긴다는 것은
상처 속에 다시
상처를 내는 것 같아
오늘 밤
잊어버리고 싶네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위벽이 타는 폐허의 잿더미
너와 나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문성해, 나비의 가을
나비는 봄 여름을 살고 가을에 죽는다
죽을 때는 몸이 날개를 인도한다
나비는 평생 날개를 부담스러워하진 않았을까
어느 날, 깨고 보니
코끼리 같은 게 양 어깨에 펄럭거리고 있었으니...
평생 몸은 얼마나 들판을 걷고 싶었을까
꽃 위에 잠시 앉았다 날아가는 나비 몸이
세차게 버둥거리고 있진 않았을까
독수리에 채여 가는 들쥐처럼
죽어가는 나비에게서
제일 먼저 떨어져나가는 것은 날개다
아직 파닥거리는 그것들을
개미들이 떠메고 어디론가 간다
어딘가에 날개들만 갈 수 있는 나라가 있으리라
그곳에서 날개만으로 날아다니는 법을 배우리
허공을 가르던 나비들이
툭 툭, 멈춘 가을 한낮
갑자기 몸이 날개가 된 나비들이
허공에서 땅으로 하얗게 날아든다
다시 개미들이 반대쪽에서 새까맣게 몰려온다
김소월, 가을 저녁에
물은 희고 길고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 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는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간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