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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기적이란 신의 소유만은 아니었구나
게시물ID : lovestory_908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52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11/03 10:57:14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김광규, 난초꽃




마루에서 동화책 읽고 있던 나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할아버지는

무슨 보물이라도 보여주려는 듯

창문에 늘어진 속 커튼을 젖혔다

창턱에는 난초 화분이 네 개

그 가운데 하나가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하얀 줄기에 샛노란 꽃잎

난초꽃 향기가 그윽하지 않으냐

난초가 들으면 안 되는

무슨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말했다


화분에 심은 풀잎처럼 보이는 난초에

흥미 없는 손자 녀석은 시큰둥하게

힐끗 쳐다보고

별것 아니라는 듯

횅하니 거실로 되돌아가 멈추었던

컴퓨터 게임을 계속했다

작은 손가락이 나는 듯 움직였다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옛날의 손자는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녀석이 나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2.jpg

 

문정희, 우울증




겨울 안개 길고 긴 터널

모든 것이 무사해서 미친 중년의 오후

전조등 하나 없는 회색 속을 걸어간다

가방에는 몇 개의 열쇠가 들어 있지만

진실로 갖고 싶은 열쇠는 없다

기적이란 신의 소유만은 아니었구나

지나온 하루하루가 모두 기적이었다

돌아보니 텅 빈 무대 아래

반수면 상태로 끝없이 삐걱이는 의자들

저기가 진정 내가 지나온 봄의 정원이었던가

 

 

 

 

 

 

3.jpg

 

송종찬, 폭탄주




한 생이 또 한 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섞이지 못하는 맥주와

양주처럼 처연하여


오늘 밤

건너가고 싶네

가슴속에 불을 질러


한 생이 또 한 생에

잠긴다는 것은

상처 속에 다시

상처를 내는 것 같아


오늘 밤

잊어버리고 싶네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위벽이 타는 폐허의 잿더미

너와 나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4.jpg

 

문성해, 나비의 가을




나비는 봄 여름을 살고 가을에 죽는다

죽을 때는 몸이 날개를 인도한다


나비는 평생 날개를 부담스러워하진 않았을까

어느 날, 깨고 보니

코끼리 같은 게 양 어깨에 펄럭거리고 있었으니...

평생 몸은 얼마나 들판을 걷고 싶었을까

꽃 위에 잠시 앉았다 날아가는 나비 몸이

세차게 버둥거리고 있진 않았을까

독수리에 채여 가는 들쥐처럼

죽어가는 나비에게서

제일 먼저 떨어져나가는 것은 날개다

아직 파닥거리는 그것들을

개미들이 떠메고 어디론가 간다

어딘가에 날개들만 갈 수 있는 나라가 있으리라

그곳에서 날개만으로 날아다니는 법을 배우리

허공을 가르던 나비들이

툭 툭, 멈춘 가을 한낮

갑자기 몸이 날개가 된 나비들이

허공에서 땅으로 하얗게 날아든다

다시 개미들이 반대쪽에서 새까맣게 몰려온다

 

 

 

 

 

 

5.jpg

 

김소월, 가을 저녁에




물은 희고 길고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 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는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간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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