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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당신의 젖은 손 같은 안부를 듣는다
게시물ID : lovestory_908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5
조회수 : 46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10/31 09:42:42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신대철, 눈 오는 길




막 헤어진 이가

야트막한 언덕집

처마 밑으로 들어온다

할 말을 빠뜨렸다는 듯

씩 웃으면서 말한다


눈이 오네요


그 한 마디 품어 안고

유년 시절을 넘어

숨차게 올라온 그의 눈빛에

눈 오는 길 어른거린다


그 사이에 눈 그치고

더 할 말이 없이도

눈발이 흔들린다

 

 

 

 

 

 

2.jpg

 

맹문재, 안부




시골에서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췌장암이 믿기지 않아

서울의 큰 병원에 확인검사를 받으려고 올라오신 큰고모님

차에서 내리자마자


여기 문재가 사는데, 문재가 사는데


서울의 거리를 메운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과 상점들 사이에서

장조카인 나를 찾으셨단다


나는 서울의 구석에 처박혀 있어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일까


나는 목덜미에 찰랑찰랑 닿는 목욕탕의 물결에도

칼날에 닿은 듯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는데

콧노래를 부른다고 믿으신 것일까


지하도로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만큼이나 보고 싶었지만

내게 부담된다고 아무 연락도 안하고

하늘까지 그냥 가신 큰고모님


아귀다툼의 이 거리를 헤매고 출근하다가 문득

당신의 젖은 손 같은 안부를 듣는다

 

 

 

 

 

 

3.jpg

 

박남준, 적막




눈 덮인 숲에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주 주저앉는다

대체로 눈에 쌓인 겨울 속에서는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오늘도 안으로 밖으로 잠긴 마음이 다시 작은 창에 머문다

딱새 한 마리가 긴 무료를 뚫고 기웃거렸으며

한쪽 발목이 잘린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며 뒤돌아갔다

한쪽으로만 발자국을 찍으며 나 또한 어느 눈길 속을 떠돈다

흰빛에 갇힌 것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4.jpg

 

이장희, 겨울밤




눈비는 개였으나

흰 바람은 보이듯 하고

싸늘한 등불은 거리에 흘러

거리는 푸르른 유리창(琉璃窓)

검은 예각(銳角)이 미끄러 간다.


고드름 매달린

저기 저 처마 끝에

서울의 망령(亡靈)이 떨고 있다

풍지같이 떨고 있다

 

 

 

 

 

 

5.jpg

 

오규원, 안개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 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 툭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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