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심보선, 삼십대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 뿐, 뭐 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 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만 뱉고 떠나도, 한 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라 부른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박진성, 귤
귤 몇 개 보도블록을 굴러떨어진다
껍질 속 열매들의 수런거림을 나는 듣는다
노을에 녹녹하게 달궈진 귤 하나 집어 들었을 때
참을 수 없어 터져 버리는 껍질 속 알맹이들의 환호를 나는 듣는다
그것들을 감추려고 귤은 보드라운 껍질 둘러메고 있었던 거다
당신의 가슴 한가운데 쭈욱 찢었을 때
오래되어서 시큼하고 맹글맹글하게 익어 있는
당신의 마음도 따라온 것이다
당신의 심장 여러 개를 주워 먹었던 거다
이기인, 몸살
늦봄과 초여름 사이 찾아온 감기가 나아질 무렵
하루 세 번 챙겨먹은 약봉지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부스럭부스럭 찾아오신 어머니가 감기를 가지고서 고구마 줄기처럼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감기가 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소나기가 좀 억세게 오는 것 같다
윗목에 앉아 억세게 비를 맞고 계신 큰 잎사귀의 몸살을 본다
김원각, 까치둥지
나도
허공 한쪽에
집 한 채 짓고 싶다
땅에서
괴로운 마음
저 높이만 올려놓아도
세상일
따라오다가
절반 이상 끊어질 것을
신영배, 시인의 말
사라지는 시를 쓰고 싶다
눈길을 걷다가 돌아보면 사라진 발자국 같은
봄비에 발끝을 내려다보면 떠내려간 꽃잎 같은
전복되는 차 속에서 붕 떠오른 시인의 말 같은
그런 시
사라지는 시
쓰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
쓰다가 시만 남고 내가 사라지는 시
내가 사라지고 시 혼자
컴퓨터 모니터 속 A4용지 왼쪽 정렬
글꼴 신명조 글자 크기 12에 맞춰
한 줄 한 줄 써내려가거나
유품을 수거한 비닐 팩 속에서
뿌려진 피와 함께 수첩의 남은 페이지를
쓱쓱 써내려가는
그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