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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경략설 결론 (엔하위키 펌)
게시물ID : history_90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rdien
추천 : 5
조회수 : 73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5/13 00:10:10

전문을 복사해서 올리고 싶었는데 용량초과인건지 다 안올라가네요;;

주소는 http://mirror.enha.kr/wiki/%EC%9A%94%EC%84%9C%EA%B2%BD%EB%9E%B5%EC%84%A4#s-3.3.3



3.4 최근 역사학 

  • 1989 ~
    냉전 종식 ~
이전까지의 각종 자료와 연구의 축적에 힘입어 제반 사료에 대한 접근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이와 더불어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계에서는 자연스레 요서경략설에 대한 회의적인 분위기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일부 요서경략설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있지만, 이들도 대체로 군사적이나 행정적인 지배보다는 상업적인 면모나 혹은 부여 잔존 세력과의 호응이라는 부분을 중시하고 있으므로 이명규가 제기한 절충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긍정론 측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형성되니, 바로 대쥬신제국사와 박영규의 떡밥 투척으로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각종 타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일련의 환빠공정. 이에 따르면 백제의 영토는 중국 대륙의 동쪽 절반으로까지 확대 과장되곤 한다.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레알 백제판 임나일본부설, 아니 그 이상이다.

3.4.1 절충론 : 해양사관의 상업거점설 

오늘날 요서경략설의 진위에 대한 여러 의견 가운데 가장 무난한 주장으로 학계의 대표적 일반론이다. 이른바 '해양사관'을 표방하는 동국대 윤명철 교수, 목포대 강봉룡 소장이 대표적.

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백제가 요서지방에 식민정권을 장기간 설치하였다면, 백제의 국력은……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제정세는 백제의 요서진출을 뒷받침하기엔 불리한 면이 있다.……백제가 요서지방과 관련이 있는 것은……해양질서의 입장이 더 바람직하다.……크기는 불문하고, 최소한 교역을 위주로 하는 식민도시나 상업기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 한국 해양사, 윤명철 지음


백제가 당시 중국 대륙에 해양 거점을 두었던 사실을 반영한다. 여기에서 요서군은 요하 서안을 지칭하는데, 백제가 여기에 해양 거점을 둘 수 있었던 것은……힘의 공백 상태에 빠져 있던 상황에 편승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진평군은 오늘날 복건성 복주시로 비정되기도 하는데,……남조 동진의 양해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바다에 새겨진 한국사, 강봉룡 지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도 2011년 4월 4일자 네이버 캐스트를 통해 이와 유사한 주장을 했다.#

대륙으로 세력을 넓혀라
두 개의 중국역사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에 고구려 서쪽인 요서지역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 요서, 진평군은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일대와는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이다. 따라서 백제가 이곳에 영토를 가지려면 강력한 해군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당시 요서 지역은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으므로, 백제가 영토를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정확히 언제, 어떤 적들을 물리치며 영토를 확보했고, 언제 이곳을 빼앗겼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없다. 심지어 북중국의 나라들의 기록에는 없고, 오직 남중국의 나라들의 기록에만 이런 기록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백제가 이때 요서, 진평군을 지배하지 않았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백제가 아닌 중국 측에서 기록한 것들을 굳이 잘못된 기록이라고 볼 이유로 충분하지가 않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고구려, 마한, 가야를 제압할 정도로 국력이 크게 강해져 있었다. 또한 직접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해양 활동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근초고왕 시기에 충분히 백제가 이곳에 영토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 일본열도로 진출할 때의 상황 등을 봐도 거리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이때 백제가 요서 지역을 지배했는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근초고왕 시기 백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요서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백제를 백제답게 만든 근초고왕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 외에도……372년 진(晉)나라와 사신 왕래를 하는 등 외교 활동 무대를 넓혔다. 무엇보다 그는 백제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업적을 남겼다.……근초고왕이 개척한 길을 따라 백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와 대륙 동해안은 물론, 차츰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백제가 화려하고도 개방적인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근초고왕이 이룩한 업적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는 백제사에 큰 길을 열어준 임금이었다.


비록 비전공자지만 상당한 연구 끝에 요서경략설과 관련된 논의를 잘 정리하고 있는 임길채의 저서 <매몰된 백제 역사를 복원한다!>도 이와 같은 적극적 상업거점으로서의 결론을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른바 백제군은 북연이 백제에 대하여 교역을 위한 활동거점을 허용해 준 곳으로, 오늘날로 치면 물류 내지 무역기지에 해당하는 것이다.……백제의 태수는 당해 군(郡)에 대한 전반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국민에 대해 제한된 권한을 가진 오늘날의 영사(嶺事)와 비슷한 존재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 매몰된 백제 역사를 복원한다!, 임길채 지음

3.4.2 긍정론 : 일시적 군사진출설 

실제로 중국 기록을 훑어보면, 요서 지역에서 백제 군현이 몇 년 이상 존속할 만큼 힘의 공백상태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기간이나마……힘의 공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백제가 아주 단기간, 즉 몇 달 정도만이라도 세력을 뻗쳤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13] -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 한국 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지음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 대구가톨릭대 강종훈 교수가 대표적.

중국의 최남부지역인 광서장족자치구에 '백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백제군은 그 자치구 내의 해변에 있는 흠주시의 북방 50㎞에 위치한 지금의 백제향 일대가 되겠다. 진평군은 그 자치구 내의 창오현 일대가 아니라면복건성의 복주로 새롭게 비정된다.……이러한 위치 비정이 타당하다면 백제가 항로와 관련지어 설치한 진평군은, 이것을 둘러싼 유송과의 갈등으로 3년 만에 폐지되었다. - 살아있는 백제사, 이도학 지음

이도학 - 본래 백제군을 중국 광서장족자치구의 백제 관련 지명으로 비정하는 의견이었으나 2010년 연말에 대하사극 근초고왕 방영이 임박하여 요서경략설이 다시 주목받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도학 교수가 요서경략설을 지우지 말아야 한다며 요서경략은 백제가 후연과 함께 공동의 적인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에 맞서는 과정에서 후연 영토에 파견한 백제군이 후연 멸망후 후연의 옛 땅에 눌러앉으며 이루어진 것이라는 다소 독특한 견해를 제시했다.

다급한 후연은 고구려의 앙숙인 백제에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백제군은 요서 지역에 진출해서 고구려의 서진을 막고자 했다. 그런데 그 직후 붕괴된 후연 정권의 후신이자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의 북연 정권은 408년에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다.……결국 백제군은 기왕에 진출한 요서 지역에 대한 실효 지배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 백제의 기원과 모용선비, 이도학 지음

한편 강종훈 교수는 동진이 요서지방의 부여계 여씨(부여씨, 백제 왕실의 성씨임) 군벌과 백제를 이용해 고토회복을 하려 했던게 백제의 요서경략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개연성보다는 가능성이라 할 정도의 소설가설이라 정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14]
  • 백제의 진출 기록은 다음과 같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남조 지배층에게는 '유명한'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조의 사관들이 활동하던 기간에도 존재하던 나라이기 때문에 사료 작성시에 '검증 가능'한 자료들이었고, 명칭의 오기는 가능하나, 없었던 일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중국의 왕조들은 '책봉'의 과정에서 "나라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 385년 요서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여암과 백제 진출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 여암의 성인 餘가 백제 왕족의 성과 같았고 백제가 훗날 남부여를 자칭했기 때문에 남조의 사관이 이를 백제의 요서진출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 검증 가능한 자료이기 때문에 '착각'이라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 여암은 부여계 인물임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4000여명의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 병력을 후연을 상대하기는 불가능하다.
    • 4세기 후반, 백제의 해상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 해상활동(무역)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백제 왕실과 부여계 인물들의 연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 백제의 요서지방 진출은 고구려의 요동지방진출보다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거의 시간차가 없는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 요동/요서 지방은 전진-후연 교체기의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 고구려의 고국양왕(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은 서기 385년에 요동군과 현토군을 점령하여 요동진출을 시도했다.
    • 고구려의 요동진출은 반년 후인 385년 11월에 요동을 후연에게 빼앗기면서 좌절되었다.
  • 백제는 서기 385년에 요서 지방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 백제는 371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 요서 지방은 전쟁으로 인해 383~386년에는 혼돈에 빠져있었다.[15]
    • 백제의 왕은 낙랑군의 태수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충성을 바칠 의무를 가진 존재였기 때문에 동진이 요청한 '원군'일 가능성이 높다.
  • 왜 군대를 보냈을까?
    • 285년 부여는 선비족 모용씨의 침략을 받아 일시적으로 멸망했었다.
    • 진은 선비족 모용씨를 몰아내고, 나라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 백제는 부여의 후손이다. 당연히 많은 친척이 후연에 있었다?
  • 결론
    • 385년 고구려는 요동 지방을, 백제는 요서 지방에 진출했다.
    • 백제는 동진의 원군으로써 385년 7~11월 사이에 요서 지방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실효적 지배를 이루기 전에 다시 쫓겨났으므로 유물이나 유적 따윈 없다.
    • 385년 11월, 후연은 3만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요서 지역을 점령하였다. [16]
  • 여파
    • 침류왕의 사망 
      • 사망당시의 나이는 약 30대: 침류왕의 아들이 너무 어려 동생이 왕위를 이었다.
      • 일본서기에 따르면 정변이나 시해의 분위기는 없다.
      • "진서 123권 전기23"에 따르면 여암과 형제관계에 있던 사람이 같이 모용농에게 참살되었다.[17]
    • 고구려의 침공이 거세졌다.
    • 백제의 군사력 약화로 인해 왜의 군사원조를 받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4.3 사이비 : 유사역사학의 대륙백제설 

요서경략설과 뗄래야 뗄수 없는 유사품으로 대륙백제설이 있다. 이쪽은 백제가 애초에 대륙에서 출발했다거나 요서경략설에서 주장하는것 이상의 거대한 영토를 대륙에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 위례성은 산동반도에 있고, 관미성은 황하 하구에 있다...고 주장하나, 그 주장의 황당함이 환빠스틱하기 이를데 없어 딱히 논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한자오독에서 시작되는 무개념, 무논리, 비이성의 3박자가 고루 갖춰진 주장이므로 임나일본부설과 다름없다. 아니 실상을 따지자면 학계의 정식 주장이 아니라 그렇지, 그보다 더하다. 판타지 소설을 쓰고싶더라도 어지간하면 더 좋은 소재를 잡기를 권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http://pds20.egloos.com/pds/201010/13/11/b0016211_4cb50614be9c3.jpg

드라마로도 나왔다.[18] 이문열의 대륙의 한은 드라마 근초고왕으로 원작으로 인용되긴 했지만 백제의 대륙진출 보단 부여계 군벌이 요서에 기반했다는 쪽으로 가정해 소설을 펴냈다.(소설 요서 진출의 주체는 근초고왕과 권력투쟁에 진 계왕의 자식들이다.) 원작은 요서경략설에서도 절충론에 가까운 주장인데 이렇게 원작을 왜곡해놓으니 실로 불건전함!

3.4.4 부정론 : 중국사와의 교차 검증 

한편 여호규 교수가 후연의 여씨 가문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을 가지고 백제 왕실 성씨가 여씨인것과 헷갈렸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역사 밸리의 유명 블로거 야스페르츠가 요서경략설 비판에 대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부흥 카페에서도 많은 비판이 이루어져 상당히 개선된 상태.

구당서 고려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高麗者, 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即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裏. 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於營州, 南渡海至於百濟, 北至靺鞨. 

구당서 백제전에는 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裏,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고구려의 백제의 위치 관계는 서로 渡海하여 至하도록 되어 있군요. 西渡海至越州를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보유하여 그 영토는 월주와 접경한다." 또는 "서쪽으로 월주를 영토로 삼아 땅이 여기까지 이른다." 라고 해석한다면,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인천 앞바다를 건너 상대편 쪽에 영토를 보유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

문장 일부만 끊어가지고 뜻을 만들어내지 맙시다. #

3.4.5 기타 주장 


백제의 요서지배를 암시하는 기록으로는 북위-백제 전쟁 기록이 있다. 한편, 통전에는 요서지방의 백제 식민지가 소멸해과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기록이 있다는 설이 인터넷에서 제기되곤 하는데, 당의 백제 지배 기지인 웅진도독부가 요동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 따르면

"본국(백제가) 무너지자 성 밖에 남아있던 무리들은 차차 약해져서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서 투항해 버렸으며, 군주인 부여숭扶餘崇은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으로 하여 마침내 백제는 소멸하였다." -통전

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인용한것. 괄호 부분이 바로 빠진 부분이다. 여기서 빠진 문장을 집어넣으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나오게 된다.

(其舊地沒於新羅) 城傍餘衆 後漸寡弱 散投突厥及靺鞨 其主扶餘崇 竟不敢還舊國 (土地盡沒於新羅靺鞨) 扶餘氏君長遂滅

그 옛땅은 신라에게 넘어갔다. 성의 남은 무리들은 점점 적고 약해져 돌궐과 말갈로 흩어졌다. 그 주인 부여숭은 옛나라에 감히 돌아가지 못했는데 토지가 신라와 말갈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부여씨 군장은 드디어 멸망했다. 
이 내용은 부여융 이후의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옮겨보냈다가 결국 폐지시킨 내용인것이다. <삼국사기>에도 隆不敢入舊國이라고 비슷한 문장이 나오므로 낚이지 말자.

또 흔히 양당서에 발해가 백제의 옛땅을 차지했다는것을 긍정론의 근거로 삼기도 하는데 그에 대한 반박으로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는것을 들수 있다.
二月,甲戌,徙安東都護府於遼東故城;先是有華人任安東官者,悉罷之. 徙熊津都督府於建安故城;其百濟戶口先徙於徐ㆍ兗等州者,皆置於建安.

이것은 웅진도독부를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인데 웅진도독부는 당시에 백제라고도 불렸고, 후에 발해가 웅진도독부(백제)가 있던 요동 일대에 진출하면서 그 땅을 차지하니 양당서에 발해말갈이 백제의 구토를 신라와 함께 나눠가졌다는 기록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라와 말갈(발해)이 백제의 땅을 차지했다는 내용에 대한 사실이라고 할수 있다.



문제는 백제가 기록대로 요서를 점령했다면 이후 요서 부근 세력과의 충돌이 기록에 나타나야 하는데 요서 백제를 암시하는 기록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장 큰 결점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북조와 한국 측 기록의 부재, 이를 커버할 수 있는 유물 유적 또한 부재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기술력을 보았을 때 원거리 항해가 힘들었다는 것 또한 부정적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 다만 연안항해는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가능했고, 서해안에서 산동반도로 넘어가는 항로를 원거리 항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록상 남조계 사서에만 등장하며, 이후 백제가 차지했단 요서지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수있는 기록도 거의 없다. 또한 백제가 요서로 진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필요성의 문제도 있다. 요동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을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고구려와의 충돌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진말이라는 시기는 사마염의 그 진으로 서진과 동진이 있는데, 서진 멸망이 316년. 이후는 오호 십육국의 혼란기가 시작된다. 그 이후의 진은 이미 남쪽으로 이동한 동진. 동진이 멸망한 것은 5세기초 420년이다. 이 시기 요서 지역의 북조 국가는 광개토대왕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의 후연이 존재했다가 무너지고 북위가 정복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진말을 서진으로 보느냐 동진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중국의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되고, 동기도 가능성도 전혀 달라진다.[19]

요서가 아닌 백제의 상황을 보더라도 과연 백제가 요서로 진출할 여력이 있었는가에 문제가 제기된다. 진말에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한 시기라고 하면 이는 백제가 광개토대왕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근초고왕 시대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해당 시기에는 고구려는 요동으로 진출하지 못했고 오히려 요동을 차지하고 있던 전연의 모용황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는 등의 굴욕을 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긴다. 백제가 요서 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라 하면 우선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시기로 잡는다. 그러나 정작 요서경략설을 증명하고 있는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약유하니 백제가 요서를 점령하였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것은 광개토왕 시기이다. 즉, 시간적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박도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다. 고구려왕으로 요동을 공격한 최초의 사례는 미천왕의 서안평 공략이기 때문에,[20] 시기적으로 후대인 소수림왕의 요서공략 가능성도 모순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런 반박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고, 요서경략의 최초가능시기만 더 앞당겨 놓은 셈이 되어서 혼란만 더 커졌다.

양직공도에서 요서점령의 주체가 백제가 아닌 낙랑으로 표기했다는 것도 부정론의 주된 근거 중 하나이며, 긍정론이 주류였던 국사학계를 대혼란에 빠뜨린 이유이기도 하다. 백제왕의 책봉호에 낙랑이 들어가는 점에서 보듯이 낙랑을 백제 등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곤 했으므로 설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로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 때문이다.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하면서 낙랑군을 쫓아냈을 때 낙랑군이 백성들과 함께 요서로 옮겨간 것은 확실하게 기록이 남아있는 내용이므로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할 때 낙랑이 요서에 진출하였다"로 읽는다면 기사의 '낙랑'은 거의 의문의 여지 없이 낙랑군으로 보게 되는 것. 더구나 양직공도의 해당 기사는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다른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서 백제 대신 낙랑이라고 고쳐썼기 때문에 마치 백제가 진출했다는 기록의 오류를 바로잡는 듯이 보인다.

양직공도 때문에 부정론에서 "백제가 실제로 요서로 진출하지 않았다면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기사는 대체 왜 나타나는가" 라는 점을 설명해야 하는 난점이 거의 완전하게 해소된 점도 문제였다. 이는 바로 백제를 낙랑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점 때문인데,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기록 자체가 바로 낙랑군을 지칭한 '낙랑'을 백제로 착각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설명이 되었다고 그걸로 정리가 되었다면 이 문서가 이렇게 장문으로 작성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주장이 완전히 정설로 기록되지 못한 것은 그에 대한 상당한 비판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만약 낙랑과 백제의 문제를 구별한 것이라면 아무 상관없는 낙랑의 기사가 백제를 설명하는 도중에 왜 등장하느냐는 것이다.[21] 양직공도 자체는 화첩으로 양나라에 보낸 사신들을 그리고, 그 문화를 간단하게 소개한 물건이다. 그리고 문제시 되는 부분도 백제사신을 그린 부분에서 등장한다. 때문에 문맥적으로 보면 백제에 대한 이야기에서 낙랑에 대한 언급이 맥락없이 한 줄이 들어간 셈이 된다. 애초에 이 것이 정식 역사서도 아니고, 이걸로 오류를 바로 잡고 뭐고 하기도 어렵고, 여기서 오류를 잡았다면 다시 뒤의 사적들이 백제로 돌아선 것은 또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때문에 낙랑을 단순한 오기, 혹은 백제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존재한다. 이 경우라면 양직공도는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 아니라 오류 하나 추가한 셈이 된다.

또한 역으로 치고 들어가는 해석도 있는데, 양직공도의 띄어쓰기를 晉末 駒麗畧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晉平縣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면 앞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고구려의 요동과 낙랑 공격이 거의 동시대로 이해되기 때문에 미천왕대의 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진짜 골치아픈 것은 양직공도를 모사한 것으로 알려진 제번공직도를 다시 제기만 옮긴 애일음노서화소록이 주목받으면서[22]의 백제국사 제기에는 해당 항목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존의 양직공도와 현재 발견된 판본의 진위 논란부터 시작해서, 해석의 문제 등에 골치아픈 문제가 제기되었다.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남조측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고, 북조측 사서에는 없다는 걸로 보아 남조측에서 북조를 깎아내리기 위해 서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조와 북조의 남조의 사서 모두 상대의 국명을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없는 사실을 기록한 예는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남조 사서의 기록이라고 해도 결국 당대사인 진서 혹은 송서의 답습이 될 수 밖에 없는데 반해서 북조 사서의 저본이 되어야 할 북위서가 문제가 많다는 것도 문제이다.[23] 통사를 기술한 자치통감이나 5호 16국 시대에 대한 정사로 꼽히고 있는 진서가 이에 대해서는 남조의 역사서를 답습한 것 역시 이 때문이 아니냐는 반발이 존재하는 것이다.

4 소결 

위의 내용처럼 각 주장에는 긍정설과 부정설 모두 반박과 재반박이 존재하는데, 이게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시기도 서진이 멸망한 316년 이전부터 시작해서 동진이 멸망한 420년이전인 후연 멸망시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이 때문에 긍정설의 경우도 만일 존재하였다면 도대체 언제 등장했느냐에 대한 이설도 분분하다. 

다만 규모에 있어서는 그렇게까지 큰 규모는 아닐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통설로, 경제적 영향력을 주장하는 학설도 유력하다. 이 경우라면 신라방의 백제버젼. 

이런 혼란으로 인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어느 한 쪽이 진실이다라고 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학설들이 보이는 공감대는 '백제가 대규모의 식민지를 장기적으로 경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도이다. 

요서경략설과 함께 묶여서 떠도는 '동성왕 시기 위로의 공격 기사'는 그 자체로 찬반이 많은 동시에, 북위의 도해 공격 가능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요서경략설의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연관을 부정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참고대상.

문제는 확실하지 않은 가설임에도 금성출판사를 비롯한 국정 국사교과서 대부분에, 그것도 근초고왕 대와 맞물려 '진출'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사실마냥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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