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요서지배를 암시하는 기록으로는 북위-백제 전쟁 기록이 있다. 한편,
통전에는 요서지방의 백제 식민지가 소멸해과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기록이 있다는 설이 인터넷에서 제기되곤 하는데, 당의 백제 지배 기지인 웅진도독부가 요동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 따르면
"본국(백제가) 무너지자 성 밖에 남아있던 무리들은 차차 약해져서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서 투항해 버렸으며, 군주인 부여숭扶餘崇은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으로 하여 마침내 백제는 소멸하였다." -통전 |
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인용한것. 괄호 부분이 바로 빠진 부분이다. 여기서 빠진 문장을 집어넣으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나오게 된다.
(其舊地沒於新羅) 城傍餘衆 後漸寡弱 散投突厥及靺鞨 其主扶餘崇 竟不敢還舊國 (土地盡沒於新羅靺鞨) 扶餘氏君長遂滅
그 옛땅은
신라에게 넘어갔다. 성의 남은 무리들은 점점 적고 약해져
돌궐과
말갈로 흩어졌다. 그 주인 부여숭은 옛나라에 감히 돌아가지 못했는데 토지가 신라와 말갈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부여씨 군장은 드디어 멸망했다.
이 내용은
부여융 이후의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옮겨보냈다가 결국 폐지시킨 내용인것이다. <
삼국사기>에도 隆不敢入舊國이라고 비슷한 문장이 나오므로 낚이지 말자.
또 흔히 양당서에
발해가 백제의 옛땅을 차지했다는것을 긍정론의 근거로 삼기도 하는데 그에 대한 반박으로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는것을 들수 있다.
二月,甲戌,徙安東都護府於遼東故城;先是有華人任安東官者,悉罷之. 徙熊津都督府於建安故城;其百濟戶口先徙於徐ㆍ兗等州者,皆置於建安. |
이것은 웅진도독부를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인데 웅진도독부는 당시에 백제라고도 불렸고, 후에 발해가 웅진도독부(백제)가 있던 요동 일대에 진출하면서 그 땅을 차지하니 양당서에 발해말갈이 백제의 구토를 신라와 함께 나눠가졌다는 기록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라와 말갈(발해)이 백제의 땅을 차지했다는 내용에 대한 사실이라고 할수 있다.
문제는 백제가 기록대로 요서를 점령했다면 이후 요서 부근 세력과의 충돌이 기록에 나타나야 하는데 요서 백제를 암시하는 기록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장 큰 결점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북조와 한국 측 기록의 부재, 이를 커버할 수 있는 유물 유적 또한 부재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기술력을 보았을 때 원거리 항해가 힘들었다는 것 또한 부정적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 다만 연안항해는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가능했고, 서해안에서 산동반도로 넘어가는 항로를 원거리 항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록상 남조계 사서에만 등장하며, 이후 백제가 차지했단 요서지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수있는 기록도 거의 없다. 또한 백제가 요서로 진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필요성의 문제도 있다. 요동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을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고구려와의 충돌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진말이라는 시기는 사마염의 그 진으로 서진과 동진이 있는데, 서진 멸망이 316년. 이후는 오호 십육국의 혼란기가 시작된다. 그 이후의 진은 이미 남쪽으로 이동한 동진. 동진이 멸망한 것은 5세기초 420년이다. 이 시기 요서 지역의 북조 국가는 광개토대왕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의 후연이 존재했다가 무너지고 북위가 정복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진말을 서진으로 보느냐 동진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중국의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되고, 동기도 가능성도 전혀 달라진다.
요서가 아닌 백제의 상황을 보더라도 과연 백제가 요서로 진출할 여력이 있었는가에 문제가 제기된다. 진말에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한 시기라고 하면 이는 백제가
광개토대왕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근초고왕 시대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해당 시기에는 고구려는 요동으로 진출하지 못했고 오히려 요동을 차지하고 있던 전연의 모용황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는 등의 굴욕을 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긴다.
백제가 요서 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라 하면 우선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시기로 잡는다. 그러나 정작 요서경략설을 증명하고 있는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고구려가 요동을 약유하니 백제가 요서를 점령하였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것은 광개토왕 시기이다. 즉, 시간적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박도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다. 고구려왕으로 요동을 공격한 최초의 사례는 미천왕의 서안평 공략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후대인 소수림왕의 요서공략 가능성도 모순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런 반박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고, 요서경략의 최초가능시기만 더 앞당겨 놓은 셈이 되어서 혼란만 더 커졌다.
양직공도에서 요서점령의 주체가 백제가 아닌 낙랑으로 표기했다는 것도 부정론의 주된 근거 중 하나이며, 긍정론이 주류였던 국사학계를 대혼란에 빠뜨린 이유이기도 하다. 백제왕의 책봉호에 낙랑이 들어가는 점에서 보듯이 낙랑을 백제 등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곤 했으므로 설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로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 때문이다.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하면서
낙랑군을 쫓아냈을 때 낙랑군이 백성들과 함께 요서로 옮겨간 것은 확실하게 기록이 남아있는 내용이므로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할 때 낙랑이 요서에 진출하였다"로 읽는다면 기사의 '낙랑'은 거의 의문의 여지 없이 낙랑군으로 보게 되는 것. 더구나 양직공도의 해당 기사는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다른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서 백제 대신 낙랑이라고 고쳐썼기 때문에 마치 백제가 진출했다는 기록의 오류를 바로잡는 듯이 보인다.
양직공도 때문에 부정론에서 "백제가 실제로 요서로 진출하지 않았다면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기사는 대체 왜 나타나는가" 라는 점을 설명해야 하는 난점이 거의 완전하게 해소된 점도 문제였다. 이는 바로 백제를 낙랑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점 때문인데,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기록 자체가 바로 낙랑군을 지칭한 '낙랑'을 백제로 착각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설명이 되었다고 그걸로 정리가 되었다면 이 문서가 이렇게 장문으로 작성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주장이 완전히 정설로 기록되지 못한 것은 그에 대한 상당한 비판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만약 낙랑과 백제의 문제를 구별한 것이라면 아무 상관없는 낙랑의 기사가 백제를 설명하는 도중에 왜 등장하느냐는 것이다. 양직공도 자체는 화첩으로 양나라에 보낸 사신들을 그리고, 그 문화를 간단하게 소개한 물건이다. 그리고 문제시 되는 부분도 백제사신을 그린 부분에서 등장한다. 때문에 문맥적으로 보면 백제에 대한 이야기에서 낙랑에 대한 언급이 맥락없이 한 줄이 들어간 셈이 된다. 애초에 이 것이 정식 역사서도 아니고, 이걸로 오류를 바로 잡고 뭐고 하기도 어렵고, 여기서 오류를 잡았다면 다시 뒤의 사적들이 백제로 돌아선 것은 또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때문에 낙랑을 단순한 오기, 혹은 백제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존재한다. 이 경우라면 양직공도는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 아니라 오류 하나 추가한 셈이 된다.
또한 역으로 치고 들어가는 해석도 있는데, 양직공도의 띄어쓰기를 晉末 駒麗畧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晉平縣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면 앞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고구려의 요동과 낙랑 공격이 거의 동시대로 이해되기 때문에 미천왕대의 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진짜 골치아픈 것은 양직공도를 모사한 것으로 알려진 제번공직도를 다시 제기만 옮긴 애일음노서화소록이 주목받으면서의 백제국사 제기에는 해당 항목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존의 양직공도와 현재 발견된 판본의 진위 논란부터 시작해서, 해석의 문제 등에 골치아픈 문제가 제기되었다.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남조측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고, 북조측 사서에는 없다는 걸로 보아 남조측에서 북조를 깎아내리기 위해 서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조와 북조의 남조의 사서 모두 상대의 국명을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없는 사실을 기록한 예는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남조 사서의 기록이라고 해도 결국 당대사인 진서 혹은 송서의 답습이 될 수 밖에 없는데 반해서 북조 사서의 저본이 되어야 할 북위서가 문제가 많다는 것도 문제이다. 통사를 기술한 자치통감이나 5호 16국 시대에 대한 정사로 꼽히고 있는 진서가 이에 대해서는 남조의 역사서를 답습한 것 역시 이 때문이 아니냐는 반발이 존재하는 것이다.
위의 내용처럼 각 주장에는 긍정설과 부정설 모두 반박과 재반박이 존재하는데, 이게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시기도 서진이 멸망한 316년 이전부터 시작해서 동진이 멸망한 420년이전인 후연 멸망시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이 때문에 긍정설의 경우도 만일 존재하였다면 도대체 언제 등장했느냐에 대한 이설도 분분하다.
다만 규모에 있어서는 그렇게까지 큰 규모는 아닐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통설로, 경제적 영향력을 주장하는 학설도 유력하다. 이 경우라면 신라방의 백제버젼.
이런 혼란으로 인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어느 한 쪽이 진실이다라고 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학설들이 보이는 공감대는 '백제가 대규모의 식민지를 장기적으로 경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도이다.
요서경략설과 함께 묶여서 떠도는 '동성왕 시기 위로의 공격 기사'는 그 자체로 찬반이 많은 동시에, 북위의 도해 공격 가능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요서경략설의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연관을 부정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참고대상.
문제는 확실하지 않은 가설임에도 금성출판사를 비롯한 국정 국사교과서 대부분에, 그것도 근초고왕 대와 맞물려 '진출'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사실마냥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