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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 10조의 진실과 오해
게시물ID : history_186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난나이뿐이야
추천 : 13
조회수 : 5457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4/11/03 22:35:58
943년 고려 태조가 그의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10가지의 유훈을 남겼다.
 
일명 훈요 10
 
주요 내용을 보면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사사(寺社)의 쟁탈·남조(濫造)를 금할 것,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不肖)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서경(西京)을 중시할 것,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차현(車峴) 이남의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백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등이다.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훈요십조 [訓要十條] (두산백과)
 
이중 뜨거운 감자인 조항이 있다.
바로 8조의내용 차현 이남의 공주강외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이다.
차현 이남의 공주강외는 금강 이남지역 즉 호남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소리다.
 
일부 극우적 사람들은 역시 호남사람은 쓰면 안돼지역갈등 및 민족통합을 저해하는 발언을 서슴치않는다.
 
하지만 이 발언을 하기 전에 생각해봐야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과연 훈요10조가 진실한 사실이 맞을까?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전 그에게는 신숭겸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고려 초의 무신으로써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고 공산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왕건이 포위되자 그를 구하고 대신 전사했다.
 
신숭겸은 이정도로 왕건이 의지하고 가장 신임하는 1등 공신이었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주지방 호족출신이다. (나주는 금강이남지역 호남지역이 맞다.)
 
이정도로 신숭겸을 의지했던 왕건이였는데 훈요10조의 8조내용은 아이러니하지 않나?
 
또한 고려 현종(고려9대왕)때 거란의 2차 침입이 있었다.
 
그때 현종은 가장 신임하는 나주지방 호족세력이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갔다. 훈요 8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현종이 국가적 위기상황에 자신이 믿지 못할 세력에 피난을 가서 지내기가 쉬운 일이였을까?
 
훈요10조는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었고 훈요 10조또한 소실된 걸로 기록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항(崔沆)의 집에서 훈요 10조가 발견되었다.
 
최항이라는 인물은 경주출신으로 그는 옛 신라 세력이 기반이었고 현종의 외가는 신라계통이였다.
그가 중용하여 그를 지지하던 중신들 역시 신라 계통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이였다면 호남지역 사람들을 경계하기위하여 최항이 훈요 10조가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또한 그럴듯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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