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박성우, 굴비
노인은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편지함에서 떨어진 우편물처럼
마당 바깥쪽에 낮게 엎드린 노인은
왼팔의 극히 일부만을
파란 대문 안쪽에 들여놓은 채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노인의 오른팔에 쥐어진 검정봉지엔
비틀비틀 따라왔을 술병이 숨막힌 머리를 겨우 쳐들었다
처마 밑에는 누군가 보내준 굴비 한 두름이
대문 틈 사이로 밀려지던 손가락을 지켜본 듯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각지에서 내려온 핏줄들이 술렁이는 동안
노인은 마당 밖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야 했다
집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노인 옆에 있던 무전기가 반복해서 말했다
부검된 노인이 방안으로 옮겨지기 전부터
흑백사진 앞에 나란히 뉘워지던 굴비는
뜬눈으로 조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잔치 내내 생볏짚을 먹어야 했던 암소가
트럭에 실려나간 뒤 대문이 닫혀졌고 노인처럼
헛간으로 아무렇게나 버려지던 태우다 만 목발 하나,
밤마다 절름절름 빈 마당을 돌았다
조기는 굴비가 되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
석쇠에서조차 눈을 치켜뜨고
세상 조여오던 그물을 온몸으로 기억해낸다
신동집, 변신(變身)
잎을 벗어 버린 나뭇가지는
어찌 보면 땅에서 하늘로 뻗은
나무뿌리라 할까
뒤엎어 놓은 밤이 대낮이라면
뿌리는 가지로 변해도 될 일
간절한 꿈에서 열매가 맺고
영근 방울에서 보람이 터질 때
세계는 얼마나 아리게 도치(倒置)했을까
뒤엎어 놓은 대낮이
우리의 밤이라면
백야(白夜)여 주어(主語)없는 강물을 덮어 달라
생자(生者)를 뒤엎어 죽은 자라면
푸른 하늘은 무덤 속을 날아야 할 일
말씀은 안테나 끝으로
푸라티나의 빛을 퉁기고
저기 급하게 피안(彼岸)으로 달리는 짙은 구름群
가지로 변해 선 나무뿌리에
흔들이며 달려오는 풍경(風景)은 밀착(密着)한다.
꿈을 배우는 제비야
옳은 신화(神話)를 알려주마
나래 설익은 제비야
조향미, 양지밭
햇볕이 넘실넘실
사방 팔방 날아온
오만 가지 풀씨
멋대로 자란 풀밭
아무도 돌보지 않은 공터
큰 나무 한 그루 없어
오히려 싱그런 풀꽃들이
자유로이 풍요로이
열린 하늘 아래 넘실넘실
김영남, 상강(霜降)
길 옆에 핀 한 송이 들국화
깊은 하늘을 잡아당겨 긴장시킨다
그러자 그 하늘 어디에선가 기러기가 난다
빈 들녘을 가로질러
하얀 머릿수건 하나도 건너간다
멀리 고향이 춥다
강현덕, 동굴
물방울 떨어져
누군가 발 헛딛는 소리
어둠이 놀라서
간신히 잡은 빛 놓치는 소리
가랑잎 멋모르고 굴러와
숨으며 몸 돌리는 소리
사사삭 발 많은 벌레
가랑잎 위로 발 가는 소리
가랑잎 간지러워
한 번 더 몸 돌리는 소리
물방울 또 떨어지는 소리
누군가 거기 갇히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