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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소년 부처
경주박물관 앞마당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햇살에 눈부시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 부처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김영현, 전야
십일월은 덫에 걸리고 우리의 강은
어둡고 조용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겨울 강가에 누군가 모닥불을 태우며
꽁꽁 언 강심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겨울의 한가운데 타오르는 불꽃처럼
우리의 조국에도 봄은 오고 꽃도 필 테지만
우리는 간다 추운 겨울의 밤 가운데로
바닥만 뜨거운 값싼 여인숙 이 층
등사기와 담배꽁초와 소주잔 틈에서
사랑하는 친구들이 잠들어 있다
멱살 움켜잡던 시퍼런 분노도
소주잔에 스러지던 서러운 눈물도
개나리 고개 달밤도 지나고
우리는 간다, 가슴 깊이 출정가를 부르며
돌아오지 않으리 결코
봄과 함께 아니라면 결코
사랑하는 여자여, 기다리지 말라
돌아오지 않으리
결코 결코
이윤림, 슬픈 당나귀
언젠가 오래 전에
나비의 날개를 가졌었던 것만 같은
구름 위에 앉아 하늘을 떠다녔었던 것만 같은
난데없는 이 기억은 어디서 온 것일까
몸을 스쳐가는 어떤 그림자
슬픈 당나귀
그러나 당나귀는 슬퍼도
짐을 지고 잘 걷는다
두 귀가 크고 눈망울이 선량한
아름다운 몸
이상희, 비가 오면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윤제림, 환생
진작에 자목련쯤으로 오시거나
기다렸다 백일홍이나 수국이 되어 오셨으면
금세 당신을 가려냈으련만
하필 풀꽃으로 오셨어요, 그래
새벽같이 만나리라 잠도 못 이루고요
눈뜨자 풀숲으로 내달았는데요
그렇게 이른 시간에 우리 말
누가 있으랴 싶었는데요. 웬걸
목을 빼고 손짓하시겠거니, 짐짓 슬렁슬렁
풀밭을 헤짚는데요, 아, 이런
온 산의 풀이란 풀들이 죄다 고개를 쳐들고
사람 찾는 낯이 되지 뭐예요
이를테면, 금낭화, 맥문동, 애기똥풀
이름이나 일러 주시지요
알고 간대도 이름과 얼굴이 따로 놀아서
오늘처럼 허탕만 치고 오겠지요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