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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오래된 골목
길동 뒷길을 몇 번 돌았다
옛집 찾으려다 다다른 막다른 길
골목은 왜 막다르기만 한 것일까
골과 목이 콱 막히는 것 같아
엉거주춤 나는 길 안에 섰다
골을 넘어가고 싶은 목을 넘어가고 싶은 골목이
담장 너머 높은 집들을 올려다본다
올려다볼 것은 저게 아닌데
높은 것이 다 좋은 건 아니라고
낮은 지붕들이 중얼거린다
나는 잠시 골목 끝에 서서
오래된 것은 오래되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나무 오래된 미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나무가 미래일까
미래도 없이 우린 너무 오래 되었다
오래된 몸이 막다른 골목 같아
오래된 나무 아래 오래 앉아본다
세상의 나무들 모두 무우수(無憂樹)같아
그 자리 비켜갈 수 없다
나는 아직 걱정 없이 산 적 없어
무우(無憂)하다 우우, 우울해진다
그러나 길도 때로 막힐 때가 있다
막힌 길을 골목이 받아 적고 있다
골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다고
옛집 찾다 다다른 막다른 길
너무 오래된 골목
서정윤, 무지개
너 나 할 것 없이 고통스러운
아직은 그때가 아니길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미처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연약한 날개를 그려주고
그렇게 날아갈 수 있길
하늘이 까매지도록 바랐다
전혀 깨닫지 못한 아픔이
나보다 크게 부닥쳐 오면
유리를 지나가는 마지막 모습
내 살아온 삶만큼 허전하다
아무리 뜨거운 돌멩이를 던져도
그는 저만치서 나를 보고만 있고
내, 이 초라한 모습으로
전신을 태우며 날아가는데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풀 한 포기
바람이 불 때마다 쓰러지고
황혼으로 사라진 그대를, 나는
온 어둠을 뒤지며 헤매고 있다
조향미, 표정이 있는 사물함
복도에 즐비한 아이들의 사물함
번호대로 숫자만 두세 개 적힌 채
자물쇠 꼭꼭 잠긴 아이들의 세계
어쩌다 살짝 들여다보면
그 좁은 곳에도 저마다 살림살이 다르다
좋아하는 배우의 사진도 붙여 놓고
친구의 편지도 꼭꼭 숨겨 놓고
예쁜 인형도 하나, 좌우명도 걸어 놓았다
겉으로 보면 꼭 같은 네모잡이 상자 속에
삐뚤빼뚤 아기자기 아이들의 표정이 차곡하다
같은 교복에 같은 단발머리 찰랑거리며
같은 선생에게 같은 교과서를 배우지만
하나도 같은 마음 없듯이
저 작은 사물함도 신기하게 제각각이다
지금, 아이들은
복도까지 줄지어 앉아 시험을 치고 있다
꼭 같은 문제에 꼭 같은 답을 써 내려고
한 글자라도 다른 답을 쓸까봐
아이들은 끙끙 용을 쓰고
사물함은 꼭꼭 입 다물었다
정희성, 이것은 시가 아니다
친구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아무리 수식한다 해도
어차피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와 내 자식의 운명을
바로 보마
내 자식이 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참세상 함께 만들어가는
이것은 시가 아니라 싸움임을
분명하게 보마
강철노조의 조합원들이
파업한 지하철노조의 조합원들이
갇혀 있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한때는 우리들의 교실에서
우리와 함께 눈물로 시를 읽던 시절이 있었음을
아프게 기억하마
이것은 시가 아니다
아프게 기억하마
이 아픔이
아닌 밤 나와 내 자식의 가슴을 치고
배창자 속에 소용돌이쳐
피눈물로 서려올 새 세상을
바로보마
이상국, 시로 밥을 먹다
철원 사는 정춘근 형에게
시 한 편을 보냈더니
원고료 대신이라며 쌀을 보내왔다
그깟 몇 푼 된다고
온라인 한 줄이면 충분할 텐데
자루에 넣고 다시 포장해서 택배로
이틀 만에 사람이 들고 왔다
철원평야 들바람과
농사꾼들 발자국 깊게 파인
논바닥이 훤히 보이고
두루미 울음까지 들어 있는
쌀을 보내왔다
나는 그걸로 식구들과 하얀 이밥을 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