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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영, 새벽달처럼
밤하늘에 구멍처럼 박혔던
달이 박힌 자리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또 떠오르더니
새벽달이 되어 서녘으로 사라져가듯
점잖으신 걸음걸이로 사라져가듯
죽게 하소서, 그렇게
양성우, 마음을 비울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아니고 내 삶은 내 삶이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내 마음을 비울 수만 있다면
모든 순간마다 그림자도 없이 사라지는 나를 찾아서
내가 쉬임없이 허덕일 까닭이 어디 있겠느냐
보아라, 험하고 아득한 길 살아서 돌아온 내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고 내 눈빛은 내 눈빛이 아니다
내가 여기에서 티끌 하나 없이 온 넋을 씻고
내 마음을 모조리 비울 수만 있다면
모든 순간마다 그림자도 없이 사라지는 무수한 나를
찾아서 내가 굳이 몸 던질 까닭이 어디 있겠느냐
저 소리 없는 작은 바람 끝에도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물처럼
내 마음의 바닥까지 맑고 밝을 수만 있다면
김원각, 그림을 그리다가
붓 갈 데 안 갈 데를 분별조차 못 하면서
마구 휘둘러 놓은 파지(破紙) 직전의 그림 한 폭
내 마음
펼쳐낸다면
아 이런 형국 아닐는지
먹물에 싸인 여백들이 더욱 희게 보이는 순간
뼛속에 와 소리치는 깨우침 하나 있다
물 안 든
나머지 마음
그거나마 잘 닦으라는
박남준, 학생부군과의 밥상
녹두빈대떡을 참 좋아하셨지
메밀묵도 만두국도
일년에 한 두 어 번 명절상에 오르면
손길이 잦았던 어느 것 하나
차리지 못했네
배추된장국과 김치와 동치미
흰 쌀밥에 녹차 한 잔
내 올해는 무슨 생각이 들어
당신 돌아가신 정월 초사흘
아침밥상 겸상을 보는가
아들의 밥그릇 다 비워지도록
아버지의 밥그릇 그대로 남네
제가 좀 덜어 먹을게요
얘야 한번은 정이 없단다
한 술 두 술 세 숟가락
학생부군 아버지의 밥그릇
아들의 몸에 다 들어오네
아들의 몸에 다 비우고 가시네
이해인, 민들레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문 노란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 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