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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숲 향기 숨길
숲 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 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새워버렸소
양성우, 말
내가 던지는 나무껍질이
축축한 발자국으로 남아 있다가
바람 끝에 소리 없이 숨을지라도
잡초처럼 무성하게 살아날 것이다
외진 마당가에서 나는 늘 섭섭하고
내가 심은 한줌의 모진 말들이
아이들의 입에서 비누방울로
툭툭툭 툭툭툭 터지는 것을
나는 눈물 속에 바라보면서
진흙으로 논밭에서 늙을 것이다
내가 피운 한 송이의 작은 꽃잎이
죽어서도 두 눈을 부릅뜬다면
나는 허공에 구름으로 살며
물 묻은 씨앗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몇 마디의 가시 돋친 슬픈 말들이
새떼들과 어울려서 산맥을 넘고
갈잎으로 숲 속에 썩을지라도
돌아와 뜨겁게 속삭일 때까지
나는 비스듬히 길가에 서서
두리번거리며 기다릴 것이다
이육사, 광인(狂人)의 태양
분명 라이풀선(線)을 튕겨서 올라
그냥 화화(火華)처럼 살아서 곱고
오랜 나달 연초(煙硝)에 끄스른
얼굴을 가리면 슬픈 공작선(孔雀扇)
거칠은 해협마다 흘긴 눈초리
항상 요충지대(要衝地帶)를 노려 가다
신경림, 산그림자
이른 새벽 여관을 나오면서 보니
밤새 거리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잠시 꽃향기에 취해
길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콩나물 사 들고 가던 중년 아낙
어디 아프냐며 근심스레 들여다본다
해장국집으로 아낙네 따라 들어가
창너머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본다
창틀 아래 웅크린 아낙의 어깨를 본다
하늘과 세상을 떠받친 게
산뿐이 아니 것을 본다
정호승, 고래를 위하여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의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