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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게시물ID : lovestory_905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47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9/14 10:35:32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박인환, 밤의 노래




적막한 가운데

인광처럼 비치는 무수한 눈

암흑의 지평은

자유에의 경계를 만든다


사랑은 주검의 사면(斜面)으로 달리고

취약하게 조직된

나의 내면은

지금은 고독한 술병


밤은 이 어두운 밤은

안테나로 형성되었다

구름과 감정의 경위도(經緯度)에서

나는 영원히 약속될

미래에의 절망에 관하여 이야기도 하였다


또한 끝없이 들려오는 불안한 파장

내가 아는 단어와

나의 평범한 의식은

밝아 올 날의 영역으로

위태롭게 인접되어 간다


가느다란 노래도 없이

길목에서 갈대가 죽고

우거진 이신(異神)의 날개들이

깊은 밤

저 기아의 별을 향하여 작별한다


고막을 깨뜨릴 듯이

달려오는 전파

그것이 가끔 교회의 종소리에 합쳐

선을 그리며

내 가슴의 운석에 가라앉아 버린다

 

 

 

 

 

 

2.jpg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3.jpg

 

김영석, 밥과 무덤




밥을 보면 무덤이 생각난다


소학교 다니던 시절

어느 해 따뜻한 봄날

마을 뒷산의 한 무덤 앞에는

무덤 모양 동그랗게 고봉으로 담은

흰밥 한 그릇이 놓여있었다

지난해 흉년에 굶어죽은 이의

무덤이었다

새싹들을 어루만지는 봄볕 속에서

봉분은 그의 죽음의 무덤이고

밥은 그의 삶의 무덤인 양

서로 키를 재고 있었다

봄이 되면

눈물도 아롱이는 먼 아지랑이 속

다냥한 밥과 무덤 아롱거린다

 

 

 

 

 

 

4.jpg

 

마종기, 변경의 꽃




우리들의 의욕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지는 흙 속에서

우리들은 매일 아침 눈떴다

그러나 씨를 맺기 전에

바람에 날리는 꽃


모든 열성의 꽃은

바람이다

모든 열성의 꽃은

바람의 연료다


변경의 내막은

아직도 아픔이다

만날 수 없는 망설임이

모두 깃발이 되어

높은 성루에서 계속

꺾이고 있었다


우리들 몸 안에서 끝나는

열성 인자의 사랑

아프지 않고는 아무도

불탈 수 없다

 

 

 

 

 

 

5.jpg

 

이기철,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그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 소릴 낸 적 있었던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힘으로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을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피는 삶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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