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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 그건 당신 때문이야
나무들이 건네는 소리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빗방울이 돌에 부딪혀 이름을 새기는 것도
이젠 낯설고 먼 일이 되었다
나무 끝에 찔려 꼼짝 못 하는
저 흰 구름과의 대화도 수천 년 전이다
내가 들은 모든 소리와 빛은
둥글게 말리고 완고하게 굳어져
작은 폭탄처럼
내 몸 풀어질 때 함께 터져버릴 준비를 하고
입을 다물었다
세월 가고
옛날은 남았지만
밀어들은 모두 흩어져 납작하게 눌어붙어
드디어는 흙이 되었다
없는 것이 되었다
물방울처럼 맑고 여려
그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지금
새봄, 땅에 뿌렸던 씨앗들이 공기를 뚫고 나올 때
그 곁에 다시 앉아볼 수 있겠다
나무와 돌, 아니
모두 다 나를 지우는 일이다
오세영, 세상은
누굴 사랑했던 게지
화사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혈색
까르르 세상은 온통 꽃들의 웃음판이다
누굴 미워했던 게지
시퍼렇게 얼어붙은 그녀의 낯색
파르르 세상은 온통 헐벗은 나무들의 울음판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지만 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미움도 사랑도 버려야만 산문(山門)에 든다 하건만
노여움도 슬픔도 버려야만 하늘문 든다 하건만
먼 산 계곡에선 오늘도 눈 녹는 소리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더란 말인가
흐르는 물 위엔 뚝뚝
꽃잎만 져 내리고
정영주, 가슴 안쪽에 생기는 나무
봄이 가려운가 보다
엉킨 산수유들이
몸을 연신 하늘에 문대고 있다
노란 꽃망울이 툭툭 터져 물처럼 번진다
번져서 따스히 적셔지는 하늘일 수 있다면
심지만 닿아도 그을음 없이 타오르는
불꽃일 수 있다면
나는 너무 쉽게 꽃나무 곁을 지나왔다
시간이 꽃보다 늘 빨랐다
오랫동안 한 곳을 보지 않으면
그리고 그 한 곳을 깊이 내려가지 않으면
시가 꽃이 되지 못한다
가슴 안쪽에 생기는 나무가 더 많아
그 그늘이 더 깊어
전봉건, 물
나는
물이라는
말을 사랑 합니다
웅덩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개울이라는 말을 사랑 합니다
샘이나 늪 못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강이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바다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비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또 있습니다
이슬이라는 말입니다
삼월 어느 날 시월 어느 날 혹은 오월의 어느 날
꽃잎이나 풀잎에 맺히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
가장 여리고 약한 물 가장 맑은 물을
얼음인 이 말과 만날 때면
내게서도 물 기운이 돌다가
여위고 마른 살갗 저리고 떨리다가
오, 내게서도 물방울이 방울이 번지어 나옵니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물입니다
윤동주, 종달새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 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 길로
고기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