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박시교, 첫눈
누가 하늘 가득
느낌표를 뿌리는가
백지로 쏟아지는
먼 기억의 파편이여
그것은
또 다른 분수
물보라였다
갈채였다
김정환, 순금의 기억
온몸이 몇 천만 도로 타면
시체의 기억을 태워버릴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아닌, 순금의
기억, 아 기억만을 후대도 아닌
손닿지 않고 보이기만 하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기만 하는
느껴지지 않고 간직되기만 하는
간직되지 않고, 있는
그런 순금의 보통명사를
남겨줄 수 있을까
이형기, 엑스레이 사진
폐허의 풍경을 잡은
이 사진은 앵글이 기막히다
뼈대만 남은 고층건물
앙상한 늑골 새로
죽어서 납덩이가 된 도시를 보여준다
그 배경
담천(曇天)을 가로질러 모여든
까마귀 떼
무엇인가를 파먹고 있다
사람의 가슴이
가슴속에 흐르는 피가 붉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터지는 검은 먹물
이제 폐허는 질척거린다
내일이면 함몰(陷沒)
그리고 필경은 늪이 될 게다
수수께끼의 광선 엑스레이는
이처럼 오직 사실만을 증명한다
여태천, 마음은 왼쪽으로 흘러내린다
바람 때문일까
바람은 불지도 않았는데 모든 게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었다
때가 되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이 방의 공기들은 시간의 무게중심을 따라
한 곳으로 모여든다
해가 지고 방이 붉어지는 일처럼
무거워진 한쪽 어깨를 동쪽으로 조금씩 내리는
어디 먼 남미에서 왔을지 모를
하늘은 푸르고 구름이 하얀 그림
갑자기 마음을 들켜버린
그림의 안쪽이 궁금해지는 것은
바람의 탓이 아니다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기울어진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본다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침묵으로 애써 버텨보는
그림의 안쪽
허물어지는 건 밖의 문제도
시간 때문도 아니다
안쪽에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김광규, 가을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은
허전하다
땅을 덮은 것 하나도 없이
하늘을 가린 것 하나도 없이
쏟아지는 햇빛
불어오는 바람
하늘을 가로질러
낙엽이라도 한 잎 떨어질까 봐
마음 조인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렇게 견딜 수 있을까
명령을 받고
싹 쓸어버리기라도 한 듯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