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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불티
하루의 일을 끝내고
나는 마당의 가랑잎을 긁어모아
불을 놓았다 바람을 타고
어둠 속에서 점점이 번져 가는
불꽃은 이름다웠다
이 신비한 깃털을
우주는 그 동안 어디에 감추어 놓고 있었던가
나는 지금 우주의 황홀을
슬쩍 꺼내어 보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밤이 되자
앞마당은 어둠에 잠기고
오직 찬란한 불꽃만이 내 앞에 있었다
도랑물에 삽을 씻고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어둠 속으로 날아가는 마지막 불티를
나는 오래 오래 보고 서 있었다
불이 꺼지고
우주가 제 고운 깃털을 거두어
황급히 사라진 뒤에도
나는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심재휘, 폭설
밤에 편지를 쓰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겉봉에서 낡아갔다
회귀선 아래로 내려간 태양처럼
따뜻한 상징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거친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눈싸움을 하며 추억을 노래했으나
단단하게 뭉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설차가 지나온 길은 다시 눈에 덮이고
눈 먹은 신호등만 불길하게 깜박거렸다
바람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였으므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였다 모두들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수상한 암호 만지듯
동전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어두운 창고에서 첫사랑을 생각해야 했다
언 손을 불며 자전거 바퀴를 고치다가
씀바귀며 여뀌며 쑥부쟁이를 몰래 생각하였다
신경림, 장미와 더불어
땅속에서 풀려난 요정들이
물오른 덩굴을 타고
쏜살같이 하늘로 달려 올라간다
다람쥐처럼 까맣게 올라가
문득 발밑을 내려다보고는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이내 다시 뜨면 아
저 황홀한 땅 위의 아름다움
너희들 더 올라가지 않고
대롱대롱 가지 끝에 매달려
꽃이 된들 누가 탓하랴
땅속의 말 하늘 높은 데까지
전하지 못한들 누가 나무라랴
발을 구르며 안달을 하던 별들
새벽이면 한달음에 내려오고
맑은 이슬 속에 스스로를 사위는
긴 입맞춤이 있을 터인데
이승욱, 춘궁기의 봄을 건너기
나,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밥 먹은 후 밥집 앞 계단 위에 앉아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예쁜
동전 한 닢으로 봄을 건너고 있었다
내 눈 앞에 강물은 안 보였지만
그 땡전 일엽편주, 금빛 나뭇잎 배 같았다
하물며 그의 얼굴 오랜 햇볕에 그을은
뱃사공 닮은 것을 더 말해서 뭐 하랴
험한 소용돌이 물굽이 잘 건너가시게나
어디가 행복한 피안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네
김종철, 등신불(等身佛)
등신불을 보았다
살아서도 산 적 없고
죽어서도 죽은 적 없는 그를 만났다
그가 없는 빈 몸에
오늘은 떠돌이가 들어와
평생을 살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