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BGM] 늘 사이에서 서성인다
게시물ID : lovestory_905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33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8/31 13:39:03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문정희흔들림을 위하여

 

 

 

나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닐 때가 많다

늘 사이에서 서성인다

모두가 좌측으로

또 모두가 우측으로 가는 동안

나는 나의 측으로 갈 뿐이다

 

옛사람들이 진정 직선을 몰라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만든 것일까

먼 곳을 갈 줄 몰라

굳이 고향을 만든 것일까

저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 버린 것은 아닐까

눈알이 빠질 듯이 직선을 질주하며

무지한 대량 소비를 하며

심지어 우월감까지를

아니 좌측 혹은 우측을 소비하며

느리거나 빠른 것도

서로 차이가 되는 시대

이쪽과 저쪽이 금방 적이 되는

이 중증 폭력의 시대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좌도 우도 아니다 아니고 싶다

회색은 더구나 아니다

늘 사이에서

나를 서성일 뿐이다

 

 

 

 

 

 

2.jpg

 

한영옥여름 편지

 

 

 

그 해 여름 유난히 짱짱한 날이 있었다

그 날 좋은 햇빛 속에 들어서서

대책 없는 우리 사이 두들겨 말리려고

회암사에 올라 흘린 땀 식히고 있을 때

마당 한쪽약수 물 동그랗게 고인 곁에

동자승 한 분도 동그랗게 웃어주었다

동자승 고운 얼굴 반쪽씩 나눠 갖고

이 길그 길로 우리는 내달았다

이 길이 그땐 그토록 먼 길이었다

어느덧 그때처럼 또 여름이다

그쪽이여그 길엔 연일 비단길

꽃잎 날리는가

이쪽 이 길에도 잡풀 꽃 그럭저럭하고

올 여름 다행히 실하여 노을도 잘 흐르고

장단 맞추며 나도 이리 흥겨운 모양이니

기절한 우리 사이 가만히 내다 버리겠네

그토록 먼 길이었던 이 길로 오던 길에

흥건히 불어 빠졌던 발톱도 이젠 내다 버리겠네

그해 여름 그날가뭇없으라고 불어오는 밤바람

아득한 그쪽으로 그어진 능선 모조리 덮어가네

 

 

 

 

 

 

3.jpg

 

이현주뿌리가 나무에게

 

 

 

네가 여린 싹으로 터서 땅속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해 마침내 위로 오를 때

나는 오직 아래로 아래로 눈 먼 손 뻗어

어둠 헤치며 내려만 갔다

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 때

나는 여전히 아래로

더욱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네가 드디어 꽃을 피우고

춤추는 나비와 벌과 삶을 희롱할 때에도

나는 거대한 바위에 맞서 몸살을 하며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바늘 끝 같은 틈을 찾아야 했다

어느 날 네가 사나운 비바람 맞으며

가지가 찢어지고 뒤틀려 신음할 때

나는 너를 위하여 오직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었으나

나는 믿었다

내가 이 어둠을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는 한

너는 쓰러지지 않으리라고

모든 시련 사라지고 가을이 되어

네가 탐스런 열매를 가지마다 맺을 때

나는 더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잎 지고 열매 떨구고 네가 겨울의 휴식에 잠길 때에도

나는 흙에 묻혀 흙에 묻혀 가쁘게 숨을 쉬었다

봄이 오면 너는 다시 영광을 누리려니와

나는 잊어도 좋다

어둠처럼 까맣게 잊어도 좋다

 

 

 

 

 

 

4.jpg

 

김명인따뜻한 적막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신들

녹이지 못하는 울음소리 오래오래 오한에 떨리라

새 날갯짓으로 시절을 분간하는 것은

앞서 걸어간 해와 뒤미처 당도하는 달이

지척 간에 얼룩지우는 파문이 가을의 심금임을

비로소 깨닫는 일

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같은 하늘에서 함께 부스럭대는 해와 달을

밤과 죽음의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두어도 좋겠다

조금 일찍 당도한 오늘 저녁의 서리가

남은 온기를 다 덮지 못한다면

구들 한 장 넓이만큼 마음을 덮혀놓고

눈물 글썽거리더라도 들판 저쪽을

캄캄해질 때까지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

 

 

 

 

 

 

5.jpg

 

나희덕어느 봄날

 

 

 

청소부 김씨

길을 쓸다가

간밤 떨어져내린 꽃잎 쓸다가

우두커니 서 있다

빗자루 세워두고빗자루처럼

제 몸에 화르르 꽃물 드는 줄도 모르고

불타는 영산홍에 취해서 취해서

 

그가 쓸어낼 수 있는 건

바람보다도 적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