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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느티나무로부터
푸른 수액을 빨며 매미 울음꽃 피우는 한낮이면
꿈에 젖은 듯 반쯤은 졸고 있는 느티나무
울퉁불퉁 뿌리, 나무의 발등
혹은 발가락이 땅 위로 불거져 나왔다
군데군데 굳은살에 옹이가 박혔다
먼 길 걸어왔단 뜻이리라
화급히 바빠야 할 일은 없어서 나도
그 위에 앉아 신발을 벗는다
그렇게 너와 나와는
참 멀리 왔구나 어디서 왔느냐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느냐
어디로 가는 길이냐 물으며 하늘을 보는데
무엇이 그리 무거웠을까 부러진 가지
껍질 그 안쪽으로
속살이 썩어 몸통이 비어가는데
그 속에 뿌리를 묻고 풀 몇 포기가 꽃을 피워
잠시 느티나무의 내생을 보여준다
돌아보면
삶은 커다란 상처 혹은 구멍인데
그것은 또 그 무엇의 자궁일지 알겠는가
그러니 섣불리
치유를 꿈꾸거나 덮으려 하지 않아도 좋겠다
때 아닌 낮 모기 한 마리
내 발등에 앉아 배에 피꽃을 피운다
잡지 않는다
남은 길이 조금은 덜 외로우리라
다시 신발끈을 맨다
길상호, 희망에 부딪혀 죽다
월요일 식당 바닥을 청소하며
불빛이 희망이라고 했던 사람의 말
믿지 않기로 했다 어젯밤
형광등에 몰려들던 날벌레들이
오늘 탁자에, 바닥에 누워 있지 않은가
제 날개 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속이 까맣게 그을리는 줄도 모르고
불빛으로 뛰어들던 왜소한 몸들
신문에는 복권의 벼락을 기다리던
사내의 자살 기사가 실렸다 어쩌면
저 벌레들도 짜릿한 감전을 꿈꾸며
짧은 삶 걸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얇은 날개를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은 얼마나 큰 수렁이던가
쓰레받기에 벌레의 잔재 담고 있자니
아직 꿈틀대는 숨소리가 들린다
저 단말마의 의식이 나를 이끌어
마음에 다시 불 지르면 어쩌나
타고 없는 날개 흔적을 지우려고 나는
빗자루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홍윤숙, 추석
가랑잎 타는 냄새가 나는
어머니 굽은 등에서
빨간 열매가 한소끔 떨어진다
어머니는
열매를 익히고 타버리는
껍질인가 보다
풋콩까는 냄새가 나는
아이들 몸에서
이따금 바람에 튕기는
알밤소리가 난다
아이들은
햇볕에 타서
영그는 열맨가 보다
나도 지금은
여름에 타서 키만 남은 수수깡
꽃가루 같은 달빛을 묻히며
분주히 장지를 여는 바람이 된다
어디서
솔잎 찌는 향기
밤이 익는데
노천명, 오늘
무엇에 쫓기는 것일
막다른 골목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내가 쫓기는 것만 같다
나를 따르는 것은 빚쟁이도 아니요
미친개도 아니요
더더군다나 원수는 아니다
밤의 안식은 천년의 세월이 덮은 듯
아득한 전설
네거리 횡단 길에 선 마음
소음에 신경은 사정없이 진동되고
내 눈은 고달파 핏줄이 섰다
밤 천정의 한 마리의 거미가
보기 좋게 사람을 위협할 수도 있거니
무엇에 쫓기는 것일까
막다른 골목으로 내가 쫓긴다
불안한 날들이 낯선 정거장 모양 다닥치고
털어 버릴 수 없는 초조와 우수가
사월의 신록처럼
무성한다
이문재, 칸나
따뜻하게 헤어지는 일이 큰일이다
그리움이 적막함으로 옮겨 간다
여름은 숨 가쁜데, 그래
그리워하지 말자, 다만 한두 번쯤
미워할 힘만 남겨두자
저 고요하지만 강렬한 반란
덥지만 검은 땅 속 뿌리에 대한
가장 붉은 배반, 칸나
가볍게 헤어지는 일은 큰일이다
미워할 힘으로 남겨둔
그날 너의 얼굴빛이 심상찮다
내 혀, 나의 손가락들 언제
나를 거역할 것이니
내 이 몸 구석구석 붉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