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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4월의 가로수
머리는 이미 오래 전에 잘렸다
전깃줄에 닿지 않도록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숨막히게 답답하다
라일락 향기 짙어지면 지금도
그날의 기억 되살아나는데
늘어진 가지들 모두 잘린 채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길가의 수양버들
새 잎조차 피어날 수 없어
안타깝게 몸부림치다가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이건청, 망초꽃 하나
정신병원 담장 안의 망초들이
마른 꽃을 달고
어둠에 잠긴다
선 채로 죽어버린 일년생 초본
망초잎에 붙은 곤충의 알들이
어둠에 덮여 있다
발을 묶인 사람들이 잠든
정신병원 뒤뜰엔
깃을 웅크린 새들이 깨어
소리 없이 자리를 옮겨 앉는다
윗가지로 윗가지로 옮겨가면서
날이 밝길 기다린다
망초가 망초끼리
숲을 이룬 담장 안에 와서 울던
풀무치들이 해체된
작은 흔적이 어둠에 섞인다
모든 문들이 밖으로 잠긴
정신병원에 아름답게 잠든 사람들
아, 풀무치 한 마리 죽이지 않은
그들이 누워 어둠에 잠긴
겨울, 영하의 뜨락
마른 꽃을 단 망초
한용운, 꿈과 근심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고나
새벽 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을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간 데를 모르겄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 되어라
송수권,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
오늘 내가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
눈물을 흘린 것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를 거예요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삽니까
올해로 그분의 나이 아흔 살
오늘은 그분의 아흔한 번째 생신날
마른 북어 몇마리
연시 몇 개
그분이 좋아하시던 식혜 한 대접
상을 차리고
남한 여자와 북한 사내가
두루뭉수리로 된 아들딸 데리고
꿇어 엎드려
천 번 만 번 빌었습니다
신의주에서 안동까지
열차를 타고 소풍 갔던 그날처럼
임진강 녹슨 철로를 닦고 닦아
붕붕 신나는 기적을 울리며
당신 품에 이 손주들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시라고
천만 번 빌고 빌었습니다
당신의 생신날 아침
아내가 싸 준 찰밥덩이
무심코 도시락 뚜껑 열다가
눈물 흘린 것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를 거예요
홍윤숙, 가로등
그 길의 가로등엔
언제나 뿌연 안개 서리고
가랑비 내렸다
모 없이 둥근 모습
눈물 그렁한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한 세상
골목밖에 서서 기다리시던
기다리며 온 생애 비에 젖으시던
어머니의 얼굴은 지상을 밝히시는
가로등이었다
오늘은 내가
그날의 어머니 나를 기다리듯
떠도는 아이들의 길 위에서
밤새 뜬눈으로 서서 기다리는
기다리며 비에 젖는 가로등이 된다
긴 밤 그리움을 앓는
등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