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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파초우(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드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김용택, 눈 오는 마을
저녁 눈 오는 마을에 들어서 보았느냐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마을이 조용히 그 눈을 다 맞는
눈 오는 마을을 보았느냐
논과 밭과 이 세상에 난 길이란 길들이
마을에 들어서면 조용히 끝나고
내가 걸어온 길도 뒤돌아볼 것 없다
하얗게 눕는다
이제 아무것도 더는 소용없다
돌아설 수 없는 삶이
길 없이 내 앞에 가만히 놓인다
저녁 하늘에 가득 오는 눈이여
가만히 눈발을 헤치고 들여다보면
이 세상엔 보이지 않은 것 하나 없다
다만
하늘에서 살다간
이 세상에 온 눈들이 두 눈을 감으며
조심조심 하얀 발을
이 세상 어두운 지붕 위에
내릴 뿐이다
이시영, 시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 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몸의 사랑이 첫 발성처럼
이성부, 너를 보내고
너를 보내고
또 나를 보낸다
찬바람이 불어
네 거리 모서리로
네 옷자락 사라진 뒤
돌아서서 잠시 쳐다보는 하늘
내가 나를 비쳐보는 겨울 하늘
나도 사라져간다
이제부터는 나의 내가 아니다
너를 보내고
어거지로 숨쉬는 세상
나는 내가 아닌 것에
나를 맡기고
어디 먼 나라 울음 속으로
나를 보낸다
너는 이제 보이지 않고
나도 보이지 않고
김강태, 없다
꽃 지는 소리마저 없다
언젠가 꽃이 열렸는지 알 수가 없다
꽃이 없다
그림자를 벗어 던지고 던진 꽃잎이 없다
새끼를 밴 아픔이 없다
마지막 흘린 땀자욱도 없다
비어 있지는 않지만
내가 없으니 모두가 없어라
구름꽃 무늬진 바다인가 저 머얼리
문득 바람이 푸르르니 보인다
스스로 없다 답하는 이 없다
보일 듯 말 듯
꽃 지는 소리마저 없다
꽃의 자취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