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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각, 남해 보리암에서
소원 따위는 없고, 빈 하늘에 부끄럽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그리움 되지 못한 몸
여기 와 무슨 기도냐
별 아래 그냥 취해 잤다
박이화, 야화(夜花)
아리아나 호텔 뒷골목에는
밤만 되면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이화장, 목련장, 동백장
사철 시들 일도 없고
봄 여름 구분 없이 여기서는
일년 내내 지지 않고
꽃이 핍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
잘못 들어선 골목 끝에서 만난
그 꽃들 생각에
나는 지금 잠 못 들고 있습니다
다시 몰래 가 보고 싶고
그 중 한 송이 질끈, 꺾어보고 싶은
그런 열락의 꽃들은
단 한 번의 유혹으로
향기보다 지독한 불빛을 풍기나 봅니다
그래선지 밤만 되면 내 몸은
어디론가 불려가고 싶고
이화장 목련장 동백장
그 환한 불빛 따라
나방처럼 퍼드득, 날아들고 싶어집니다
김소월, 두 사람
흰 눈은 한 잎
또 한 잎
영(嶺) 기슭을 덮을 때
짚신에 감발하고 길짐 메고
우뚝 일어나면서 돌아서면
다시금 또 보이는
다시금 또 보이는
조지훈, 아침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석류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
아 여기 태고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라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석류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석류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김수우, 장터의 봄
도살장에 팔려갈 늙은 소의 코끝에 붙은
살구꽃 잎 한 장
소와 꽃잎이 들여다보는
길 끝, 광주리 하나 걸어온다
살 수 있을 것 같다
자전거 시장꾸러미에 높다랗게 얹혀 실려가는
붓꽃 몇 송이
나를 본다, 모든 꽃은
오랜 약속에 붙이는 느낌표이다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