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김광섭, 창호지
아주 밝은 것도 아니고
아주 어둡지도 않아서
아침 아지랑이에 햇빛 비치듯
항상 마주 앉아도 답답치는 않고
옛 산들이 어른거린다
잡음(소리)을 막아서
정(情)에 한(限)이 없고 치우치지도 않네
동방의 예지(叡智)
하루의 햇빛을 골고루 맞아들이며
성자(聖者)의 눈을 감네
정월달에 한국의 창호지에는
매화가 핀다
김영랑, 묘비명
생전에 이다지 외로운 사람
어이해 뫼 아래 비(碑)돌 세우오
초조론 길손의 한숨이라도
헤어진 고총에 자주 떠오리
날마다 외롭다 가고 말 사람
그래도 뫼 아래 비돌 세우리
「외롭건 내 곁에 쉬시다 가라」
한(恨) 되는 한마디 삭이실란가
이면우, 거미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이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거미줄에 걸린 삶이지만
망에 걸려 파닥이는 것을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떠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 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해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세영, 꽃씨를 묻듯
꽃씨를 묻듯
그렇게 묻었다
가슴에 눈동자 하나
독경(讀經)을 하고, 주문(呪文)을 외고
마른 장작개비에
불을 붙이고
언 땅에 불씨를 묻었다
꽃씨를 떨구듯
그렇게 떨궜다
흙 위에 눈물 한 방울
돌아보면 이승은 메마른 갯벌
목선(木船)하나 삭고 있는데
꽃씨를 날리듯
그렇게 날렸다
강변에 잿가루 한 줌
김송배, 비어 있음에 대하여
빈 들판에서
무심한 구름 한 점 쳐다보고
문득 들꽃들의 생명력을 떠올린다
미물이 잔뜩 엉키어
땅 속 스멀거리는 하찮은 것들도
저 푸른 하늘에 떠 있는 한 떼의 우수가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깃발을 올리고
너를 내 안에서 곰삭게 할
갖은 첨가물을 반추시킨다
때로는 가지런하던 사랑의 질서가
뒷동산 바람이듯 내 몸과 섞이고
어느덧 빈 들판에서 떠 가버린 구름자리
나 혼자임을 알았을 때
내 혼미를 누가 깨우는 환청
오오라, 그대는 그냥 바람이었느니
나도 발걸음 돌리는 어느 한 시대
그 황량을 삼키는
무한의 사유
떠도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