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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배, 늦잠
나이가 들어도 잠이 줄지 않는다
일찍 일어난 새들이
기름진 먹이를 잡는 동안
나는 아침잠에 겨워
저 이슬의 세상을 놓치고 있었다
쥐밤나무, 사탕밤나무, 외톨밤나무
밤나무 동산 밑에서 살던 어린 날에는
가을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항아리에 가득 알밤을 줍기도 했었는데
삼월리에서 당진 읍내까지
꼬박 왕복 오십 리 길을
중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여섯 해를 잘도 걸어다녔는데
그 새벽 이슬길 다 어디 두고
다른 길을 걸어왔는지
산이네 강이네 꽃이네 별이네
그런 것들은 그만두고
눈에 들어오는 무엇 하나
쭉정이 같은 사랑 하나
주워 담지 못하고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한 뼘 해를 남기고
이정록, 부검뿐인 생
터미널 뒤 곤달걀집에서
노란 부리를 내민 채 숨을 거둔
어린 병아리를 만났다 털을 뽑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맛소금을 찍을 수가 없었다
곡식 멍석에 달기똥 한 번 갈긴 적 없고
부지깽이 한 대 맞은 적 없는 착한 병아리
언제부터 이 안에 웅크리고 있었을까
물 한 모금 마셔본 적 없는 눈망울이
나를 내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폐가의 우물 속 두레박처럼
그의 눈망울에 비친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오래 제자리를 에돌았는지, 병아리의
발가락과 눈꺼풀 위에 잔주름이 촘촘했다
하늘 한 번 우러러본 적 없는, 부검뿐인 생
금이 간 창문에는, 그 줄기를 따라
작은 은박지 꽃이 붙여져 있었다
씨앗을 가질 수 있다는 듯, 은박지 꽃잎들이
앞다투어 바래어가고 있었다
천양희, 아침마다 거울을
아침마다 거울을
아침마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
거울이 물속 같다
물속에 내가 빠져 있다. 물 먹고 있다
잡을 것이 없는 물속에서
나는 허우적거린다
아무도 물속에 있는
내 속을 모른다. 몰라준다
내 심장의 고랑
내 늑골 밑의 습지
내 머릿속 웅덩이 그리고 나의 무덤
나에게는 다시 써야 할 생이 있다
세상이 잘못 읽은 나의 생
수몰된 생
암매장된 생
누가 읽기도 전에 나를 써 버렸다
그들에게 도난당한 장편의 문장들
그 때문에 틀린 생의 제목들
내 생, 너무 오래 생매장되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
나는 곧 재조명될 것이다. 밝혀질 것이다
거울같이 환하게
남진우, 가시
물고기는 제 몸 속의 자디잔 가시를 다소곳이 숨기고
오늘도 물 속을 우아하게 유영한다
제 살 속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짐짓 무시하고
물고기는 오늘도 물 속에서 평안하다
이윽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사납게 퍼덕이며
곤곤한 불과 바람의 길을 거쳐 식탁 위에 버려질 때
가시는 비로소 물고기의 온몸을 산산이 찢어 헤치고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자신을 드러낸다
김후란, 바람고리
그런 다만 흐름일 뿐
어느 기슭에 스쳐 가는
노래일 뿐
떠난다는 건 슬프다
잠든 이의 평온함이
고요의 가라앉은 목소리로
허공에 사무친다
그러나 남기고 가는 것이 있다
이어짐에 얹힌 빛이
또 다른 고리가 되어
울림을 갖는다
어제와 내일을 이어 주는
무한 공간의
바람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