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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겁난다
토막 난 낙지다리가 접시에 속필로 쓴다
숨가쁜 호소(呼訴) 같다
장어가 진창에다 온몸으로 휘갈겨 쓴다
성난 구호(口號) 같다
뒤쫓는 전갈에게도 도마뱀꼬리가 얼른 흘려 쓴다
다급한 쪽지글 같다
지렁이도 배밀이로 한자 한자씩 써 나간다
비장한 유서(遺書) 같다
민달팽이도 목숨 걸고 조심조심 새겨 쓴다
공들이는 상소(上疏) 같다
쓴다는 것은
저토록 무모한 육필(肉筆)이란 말이지
몸부림쳐 혼신을 다 바치는 거란 말이지
정호승, 꿀벌
네가 나는 곳까지
나는 날지 못한다
너는 집을 떠나서 돌아오지만
나는 집을 떠나면 돌아오지 못한다
네 가슴의 피는 시냇물처럼 흐르고
너의 뼈는 나의 뼈보다 튼튼하다
향기를 먹는 너의 혀는 부드러우나
나의 혀는 모래알만 쏘다닐 뿐이다
너는 우는 아이에게 꿀을 먹이고
가난한 자에게 단꿀을 준다
나는 아직도 아직도
너의 꿀을 만들지 못한다
너는 너의 단 하나 목숨과 바꾸는
무서운 바늘침을 가졌으나
나는 단 한 번 내 목숨과 맞바꿀
쓰디쓴 사랑도 가지지 못한다
하늘도 별도 잃지 않는
너는 지난 가을 꽁꽁 언
별 속에 피는 장미를 키우지만
나는 이 땅에
한 그루 꽃나무도 키워보지 못한다.
복사꽃 살구꽃 찔레꽃이 지면 우는
너의 눈물은 이제 다디단 꿀이다
나의 눈물도 이제 너의 다디단 꿀이다
저녁이 오면
너는 들녘에서 돌아와
모든 슬픔을 꿀로 만든다
박노해, 침묵이 말을 한다
때로 침묵이 말을 한다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
이상(理想)이 몸을 잃은 시대에는
차라리 침묵이 주장을 한다
침묵으로 소리치는 말들
말이 없어도 귓속의 귀로
마음 속의 마음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목숨의 말들
아 피묻은 흰옷들 참혹하여라
아직 말을 구하지 못한 이 백치울음
그러나 살아 있는 가슴들은 알지
삶은 불을 잉태하고 있다는 걸
진실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침묵 속에서 익어가고 침묵 속에서 키워지고
마침내 긴 침묵이 빛을 터트리는 날
푸른 사람들, 소리치며 일어설 것이다
침묵이 말을 한다
침묵이 소리친다
박두진, 변증법
날개였었지
날개였었지
높디높은 하늘 벽을 위로 부딪쳐
그 울음 혈맥 고운
하얀 새의 넋
새보다 더 먼저는
꽃잎이었었지
소리 아직 처음 일어 발음 없었던
그 침묵 오래 다져
황홀 속에 포개던
꽃잎보다 더 먼저는 햇살이었었지
그랬었지
햇살들이 비로소 꽃잎 형상져
꽃잎마다 새가 되어
하늘 날으던
하나씩의 그림자는 하나씩의 육신
육신이 땅에 태어 사슬 얽매인
벼랑에 그 바위 위에
사슬 얽매인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
어 인신(人身) 그 먼저는
날개였었지
날개였었지
김강태, 늘 푸른 공기
새벽에 일어나
솔 분재를 씻고 벤자민 잎을 닦는다
베란다 창문을 미는 뜻밖의 강한 힘
점점 거센 욕설로 내 볼을 때린다
공기칼이 환부를 째며 초대하는 아침은
단잠 든 아이들 콧소릴 타고 오는가
아내는 묵은 먼지를 청소기로 솎고
나는 아이들 방 삭은 공기를 쫓는다
믿음아 보름아
너희들 눈매와 선홍빛 입술에 공기 묻었다
방금 몰래 들어온 콧등의 맑은 입자가
영롱히 너무도 싱싱히 아롱대는구나
밤새 나눈 꿈의 결정들
엄마는 새벽물을 싱그러이 만지지만
아빠는 어제가 왠지 부끄러운 하루였다
너희는
나의 늘 푸른 공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