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갈색 머리칼을 지닌 소녀를 보았을 때, 나는 첫눈에 반했다. 지금보다 조금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때의 나는 활력이 넘쳤고 머리로 알고있는 지식과는 다르게 내게 불가능한 일이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확실히 무모한 시기였다. 간단하게 허들을 넘는 것 마냥 방해요소 따위는 간단히 무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 귀여운 소녀가 자신의 친구라 소개했던 호리호리한 청년과 입 맞추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감당하기 힘든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당시 나는 왕성한 탐구정신으로 마을 여러 곳에 비밀기지를 개척해 놓은 상태였고 소녀의 집 뒷편에는 아귀가 맞지 않는 맨홀 뚜껑이 있었다.
소녀는 나를 상당히 좋아했다. 물론 내가 바라는 그런 아릿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달려가는 내 뒤를 소녀가 쫓아왔고 가볍게 맨홀 위를 뛰어넘은 나와는 달리 소녀는 그곳에 맨홀이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소녀의 신음을 들으며 나는 밀어두었던 뚜껑을 다시 구멍 위로 끌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이 며칠인가 계속됐고 다리가 부러진 소녀의 시신이 맨홀 아래에서 덩그러니 발견되었을 땐 그 고운 얼굴이 흔적조차 없었다.
나는 더부살이하던 집에서 쫓겨났다. 소녀와 곧잘 어울리던 내가 집안을 홀로 돌아다니는 것이 소녀의 부모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인 듯 했다.
어리석었던 내 행동을 나는 깊이 반성했다. 감정은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죽음은 큰 이벤트였지만 그 뒤에 남는 것은 없었다. 새로운 사랑을 갈구하는 것보다 주어진 애정을 지키는 게 더 가치있는 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다행히 새로 들어간 집에서 나는 젊은 부부에게 사랑받았다. 그들은 아들처럼 나를 사랑해주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둘 사이에 친아들이 태어나면서 부부의 관심은 내가 아닌 갓난아이에게로 옮겨갔다.
나는 이제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특별히 더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에게 등을 내어주거나 작은 손에 코를 비비면 잠시나마 따뜻한 눈으로 부부가 나를 바라본다는 것 역시 잘 알고있다. 다만 나는 아이가 있던 그 이전 시기로 돌아가려고 할 뿐이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의 건강을 걱정한 부부가 나를 내치려고 하니까.
그저 콘센트 앞에서 젓가락을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못할 테고 슬픔의 기간 동안 나는 부부의 발치를 착실히 지키면 된다.
레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굳건한 네 발을 들어 나는 주인을 향해 힘차게 뛰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