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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 물이 마르는 소리
벽지 뒤에서 밤 두시의
풀이 마르는 소리가 들린다
건조한 가을 공기에
벽과 종이 사이의
좁은 공간을 밀착시키던
풀기 없는 풀이 마르는
소리가 들린다
허허로워
밀착되지 않는 벽과 벽지의
공간이 부푸는 밤 두시에
보이지 않은 생활처럼
어둠이 벽지 뒤에서 소리를 내면
드높다, 이 가을 벌레 소리
후미진 여름이
빗물진 벽지를 말리고
마당에서
풀잎 하나하나를 밟으면
싸늘한 물방울들이
겨울을 향하여 땅으로 떨어진다
김소월, 담배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못 잊게 생각나는 나의 담배
내력을 잊어버린 옛 시절에
났다가 새 없이 몸이 가신
아씨님 무덤 위의 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어라
어물어물 눈앞에 스러지는 검은 연기
다만 타붙고 없어지는 불꽃
아 나의 괴로운 이 맘이어
나의 하염없이 쓸쓸한 많은 날은
너와 한 가지로 지나가라
문병란, 고향의 들국화
고향의 들판 어느 구석에
이맘때쯤
남몰래 피어나 있는 들국화를
너는 알 것이다
잡초 사이에 끼어
자랑하지도 뽐내지도 않은 수지운 꽃
혼자서도 외롭지 않는
하나의 슬픈 사랑을 너는 알 것이다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독방
손바닥만 한 하늘이 찾아오는 작은 옥창에
풀벌레 울음소리 핏빛 한을 짤 때
차가운 마룻바닥 위에 앉아
눈감고 견디는 인내의 하루
이맘때쯤 노을 지는 고향의 들판 어느 구석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가녀린 숨결
한 떨기 작은 기다림을
너는 알 것이다
눈부시게 푸른 남도의 하늘 밑
서러운 사연을 간직한 채
그믐달빛 아래 쪼옥쪼옥 여위어 가는
한 떨기 고향의 슬픈 노래를
너는 알 것이다
아 진리는 무엇인가, 세삼
마음속에 맴도는 하나의 이름을 안고
벽 앞에 앉아 견디는 인고의 나날
뜨거운 픽 원통해
오늘도 긴 긴 하루 해
옥창에 한숨 지우는 제자야
너는 알 것이다, 서릿 속
날로 높아 가는 향기 머금고
모질도록 참아 내는
애타는 기다림으로, 왜 고향에
작은 들국화가 피어 있는가를
너는 알 것이다
오세영, 여윈 손
내가 잠든 뒤에도
빨래는
어둠을 지킨다
늘어진 운명의 줄을
붙잡는 여윈 손
그는 스스로
절대의 허무 앞에 던져지기 위하여
체온을 버린다
밤의 적막은
바람들의 세상이지만
깨어 있는 우주의 창밖에서
빨래는
어둠의 공간에
하나의 밧줄을 던진다
스스로 육신을 포기하는 자의
저 완벽한 연기
김명인, 할머니
삼율 지나다가 정거장 건너편 텃밭이었던 자리
이젠 누구네 마당가에
저렇게 활짝 핀 봉숭아 몇 포기, 그 옆엔
빨간 토마토가 고추밭 사이로 주렁주렁 익고 있다
왜 내겐 어머니보다 할머니 기억이 많은지
멍석을 말아내고 참깨를 털면서
흙탕물 넘쳐나는 못도랑 업고 건네면서
둑방가에 힘겨워 쉬시면서, 어느새
달무리에 들고 그 둘레인 듯 어슴푸레하게, 할머니
아직도 거기 앉아 계셔요?
나는 장수하며 사는 한 집의 내력이
꼭 슬픔 탓이라고만 말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가 추억이나 향수라는 이름 말고 저 색색의
눈높이로 고향 근처를 지나갈 때
모든 가계는 그 전설에 도달한다, 그리고 뒷자리는
늘 비어서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