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김형영, 나
수술 전날 밤 꿈에
나는 내 무덤에 가서
거기 나붙은 내 명패와 사진을 보고
한생을 한꺼번에 울고 또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흘린 눈물을 담아보니
내 육신 자루에 가득했다
살아서는 한 방울도 맺히지 않던
그 눈물
그랬구나
그랬구나
이것이 나였구나
좀 더 일찍
죽기 전에 죽었으면 좋았을 걸
배용제, 향기에 대한 관찰
젖은 쓰레기 더미 위에서
치자꽃 무리가 피었다
깨진 유리병과 망가진 잡동사니 따위로
딱딱한 형태를 견뎌낸 것들
텅 빈 공기의 틈으로 주입되는 한 호흡의
향기기 되기 위해 몰입한다
역한 핏물이 주르르 몸 밖으로 흘러나갈 때까지
부패의 꿈속으로 매몰된다
그 속에서 뿌리들이 번식하는 소리
뿌리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꽃과 열매와 벌레와 여자와 아이들이 익어간다
이곳에 이르면 모든 경계는 모호해지고
날카로움도 망가짐도 눈부신 풍경이 된다
새들 속에서 우는 잡동사니와
나뭇잎 속에서 펄럭이는 고철과
꽃들 속에서 반짝이는 유리조각
온갖 황홀한 향기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물들, 사물들 모두 응고된 공기의 흔적이 아닐지
배설물이거나 발자국이거나 혹은 눈물
가끔씩 정체를 드러내며
차갑고 날카롭게 지상을 휩쓸고 지나간다
뿌리 내린 것들은 지탱할 수 없을 때까지
몸을 부풀려 꿈 속 배경이 된다
망가질수록 황홀해지는 지상의 풍경
치자꽃 향기가 콧속으로 스민다
나는 느릿느릿 고정된 생이 형태를 망가뜨리며
수많은 사물들 사이에 눕는다
박형준, 낡은 리어카를 위한 목가
언덕길에 세워진
리어카
처음엔 희미한 빛이더니 백련(白蓮)처럼 맑고 힘차다
그런 아침이다
이사 온 날 언덕 위에 백련사가 있다 하여
백련을 볼 생각으로 잠 못 이루던 때
다음날 새벽 올라가니 자취 없고
리어카에 폐지 가득 싣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던 노부부
그리고 또 어느 이른 아침
백련사 오르던 때
아무도 끌어주는 이 없는데
할머니 혼자 리어카를 밀고 있던 모습
오늘은 할머니도 보이지 않는다
새소리 시끌시끌한
꾸부정한 나무처럼
다 허물어진 담벼락에 낡은 리어카가 기대어 쉴 뿐
백련이 피지 않는 백련사
그 모서리
리어카 손잡이를 끌어줄 자리에 대신 거미줄이 흔들린다
이슬 맺힌 은하계
아침마다 언덕길
공중에 쳐들린 손잡이를 끌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었던가
할머니가 어서 집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심수향, 중심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 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 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 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곁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돌렸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세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종대로 서 있는 배추들
늦가을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들어서고 있다
문태준, 반딧불이에게
내 어릴 적 처마 밑에는 아슬아슬한 빛들이 있어
누에의 눈 같기만 했던 빛들이 있어
빛보다 그림자로 더 오래 살아온 것들이 내 눈 속에 붐벼
나는 오늘 밤 그 가난한 가슴들에게로 가는 것인가
저릿저릿한 빛들에게로 가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