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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를 태우며
밀면 돌멩이 되어
가는 불빛에도 흔들릴
석불(石佛)로나 돌아가 웃을까
동서로 떠돌며 노래 부를까
나는 시 써서 시인이고 싶었건만
오늘은 느티나무 아래서 시들을 모아
불태우네 점점이 날아가는 새들과
아직은 체온이 남은 기억들 그리고
지평선에 떠도는 그림자들
나는 시 써서 시인이고 싶었건만
맹문재, 식성에 대하여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은 먹어도
짬뽕은 절대 먹지 않던 어린 날 식성이
바뀐 지 오래
식성이 뒤바뀌거나
둘 다 먹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모두 먹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면 복이 든다고 믿고
짜장면만 먹던 때
지나
나는 무단횡단으로 벌금을 문 적이 있다
그러나 벌금은 내게 길을 주지 않았다
나는 청춘의 규율로 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그러나 정년이 보장되지 않았다
나는 논문을 써 선거권을 쥐었다
그러나 나의 권리를 소문마저 비웃었다
텔레비전 뉴스가 은하수만큼이나 쏟아져 내리는
쓸쓸한 중국집
나는 짬뽕 국물까지 마신다
마당을 쓸던 빗자루를 던져두고
텔레비전 앞에서
바뀐 식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저녁 나의 식성은 나의 것이 아니다
박성우, 길
이파리 무성한 등나무 아래로
초록 애벌레가 떨어지네
사각사각사각
제가 걸어야 할 길까지 갉아먹어서
초록길을 뱃속에 넣고 걸어가네
초록 애벌레가 맨땅을 걷는 동안
뱃속으로 들어간 초록길이 출렁출렁
길을 따라가네
먹힌 길이 길을 헤매네
등나무로 오르는 길은 멀기만 하네
길을 버린 사내 길 위에 앉아 있네
성선경, 하여가(何如歌)
바람이 분다
바람 따라 머리칼을 흩날리며 살면 어떤가
몇 가닥 새치를 기르며 살면 또 어떤가
단추 한두 개쯤 풀고 살면 어떤가
노점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마시며 살면 어떤가
오뎅 국물을 후후 불며 안주삼아 속 풀며 살면 어떤가
자못 신경이 쓰이는 친구의 이야기도 못 들은 척
아니면 글쎄 뒤끝을 흐리며 살면 어떤가
한 번도 꽃답게 핀 적이 없었다고 너를 위해
뜨거운 적이 없었다고 찔끔거리면 어떤가
사는 것이 투사(鬪士)가 아니면 또 어떤가
바람이 불지 않는다
외투 깃을 올리고
땅만 보며 걸으면 어떤가
그렇게 살면 또 어떤가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가는 나이
마흔 다섯
김규태, 슬픔을 끊어서 운다
밤새 이슬에 젖어 있는 숲에선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그 중 애틋하다
빛이 드나들지 않는 후미진 섶에 엎드려
긴 촉수를 세우고
보이지 않는 하늘을 휘저으며
어떤 모양의 슬픔이라도
가장 짧고 애잔하게 끊어 놓은 울음
몸짓으로 느끼지 않고
어떤 혼백의 사주를 받아 흘리는
슬픈 원형의 목소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