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속리산에서
가파른 비탈길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윤제림,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의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이진명, 봄날
문방구점에 가고 싶다
백동전을 두 손에 모아 쥐고
발을 들어 올리며
저 횡단보도를 건너
자전거가 지나가고 나서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소녀들이 이르면
그 소녀들을 몇 발짝 앞세운 채
짐짓 뒤에서 늦게 문을 열고 싶다
비밀스럽게 지퍼가 채워진 필통을 골라
한 자루의 일용한 연필을 사 넣고
찰고무 지우개도 하나 사서
필통 모서리에 살짝 끼워 두고 싶다
점을 두 개나 찍어 틀렸을 때
얼른 꺼내 그 하나를 하얗게 지우리라
그러고는 백동전을 내고 싶다
큰 동전 위에
작은 백동전을 하나씩 하나씩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소녀들을 뒤로하고
먼저 문을 나서고 싶다
하늘빛이 셀로판지처럼 퍼지리라
큰 길을 건너가지 않고
집집의 대문 앞을 지나
골목으로 해서 늦게 돌아오고 싶다
담 밖으로 조금 내려서고 있는 새 잎줄기를 보면
슬쩍슬쩍 당겨 주면서
신달자, 벼랑 위의 생
너무 늦게 왔다
정선 몰운대 죽은 소나무
내 발길 닿자
드디어 마지막 유언 같은 한 마디 던진다
발 아래는 늘 벼랑이라고
몸서리치며 울부짖는 나에게
몇몇 백년
벼랑 위에 살다 벼랑 위에서
죽은 소나무는
내게
자신의 위태로운 평화를 보여 주고 싶었나 봐
죽음도 하나의 삶이라고
하나의 경건한 침묵이라고 말하고 서 있는
정선 몰운대 죽은 소나무
서 있는 나무 시체는
죽음을 딛고 서서
따뜻하고 깊은 목숨으로
내 마음에 돌아와
앞으로 다시 몇몇 백년
벼랑 위의 생을 다짐하고 있다
노창선, 보름달
매우 고맙습니다
당신의 환한 얼굴 보여주시니
잔잔한 시냇물도 보이고
새로 돋은 연둣빛 풀잎도
사월 바람에 우우 물가로 몰려나옵니다
은은한 당신의 저고리 같은 마음으로
하얗게 물든 싸리꽃도 피겠습니다
달의 향내 흩뿌려진 꽃그늘 아래
아무래도 오늘밤
진달래술 한 잔마저 기울이면
저 높은 산, 가슴 어디에
보름달 눈부시도록 솟아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