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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전환
이제는
밝음의 이쪽보다
나는 어둠의 저쪽에다
귀를 기울인다
여기서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어둠의 저쪽에다
내 귀를 모두어 세운다
이제는 눈을 감고
어렴풋이나마 들려오는 저 소리에
리듬을 맞춰 시도 쓴다
이제는 떨어지는 꽃잎보다
고요히 묻히는 씨를
내 오랜 손바닥으로 받는다
될 수만 있으면
씨 속에 묻힌 까마득한 약속까지도
그리하여 아득한 시간에까지도 이제는
내 웃음을 보낸다
순간들 사이에나 떨어뜨리던 내 웃음을
이제는 어둠의 저 편
보이지 않는 시간에까지
모닥불 연기처럼 살리며 살리며
박목월, 그것은 연륜이다
어릴 적 하찮한 사랑이나
가슴에 박여서 자랐다
질 곱은 나무에는 자줏빛 연륜이
몇 차례나 몇 차례나 감기었다
새벽 꿈이나 달 그림자처럼
젊음과 보람이 멀리 간 뒤
나는 자라서 늙었다
마치 세월도 사랑도
그것은 애달픈 연륜이다
천상병, 피리
피리를 가졌으면 한다
달은 가지 않고
달빛은 교교히 바람만 더 불고
벌레소리도 죽은 이 밤
내 마음의 슬픈 가락에 울리어오는
아! 피리느 어느 곳에 있는가
옛날에는
달 보신다고 다락에선 커다란 잔치
피리 부는 악관이 피리를 불면
고운 궁녀들 춤을 추었던
나도 그 피리를 가졌으면 한다.
볼 수가 없다면은
만져라도 보고 싶은
이 밤
그 피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
윤동주,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이정록, 뒷짐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 뒤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
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
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
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
아기를 잘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밀쳐놓은 빈손 위에
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