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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꽃냉이
모래 속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지
모래가 얼마나 오랫동안 심장을 말려왔는지
내 안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말려 왔는지
전에는 겹백일홍이었을지도 모를
겹동백이었을지도 모를
꽃잎과 꽃잎 사이
모래와 모래 사이
나와 그 사이
그 촘촘했던 사이
보아라
지금은 손가락 쑥쑥 들어간다
헐거워진 자국이다
떠나간 맘들의 자국
피 마른 혈관의 자국
신두리 모래벌판 가본 사람은 알지
피 마른 자국마다 꽃 피는 거
헐거워진 모래 자궁으로도 노랗게 꽃 피우는 거
지금, 신두리 모래벌판 꽃냉이 한철이다
슬픔도 꽃처럼 한철을 맞는다
정일근, 즐거운 직업병
신문기자 시절 나의 직업병은
기사 속에 시를 담으려는 것
6하 원칙의 하드보일러 영토에
나는 시의 씨앗을 뿌렸다
나의 밭은 번번이 칼질을 당하고
더러는 푸른 잎사귀 한 장 달지 못한 채
구겨져 쓰레기통으로 날아갔다
그런 날이면 그놈들 다시 주워와
빳빳하게 다려서 시의 이름을 달아주었다
신문기자라는 일을 놓아버리고
시 쓰는 일이 내 천직이 되고부터
나의 새로운 직업병은
눈만 뜨면 세상만사를 은유하는 것
틈만 나면 말씀과 말씀 사이의
침묵의 비밀을 캐내려는 것
그래서 꽃이 피는 이유가 궁금하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알고 싶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 긴 시간을 조용히 노래를 부르거나
풀꽃과 나무와 개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나의 직업병은 귀에
그들의 대답이 들리는 것이다, 아주아주
멀리 있는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이다
별과 오래 중얼거리는 것을 본 새벽
아내는 걱정 깊어 내 이마를 짚어주지만
나는 오래오래 이 직업병을
지병처럼 끙끙 앓을 것이다
이 병의 치료법은 하나, 시를 놓는 일
그분이 다시 나를 불러 떠날 때까지
나는 시를 첫사랑처럼 껴안고 살 것이니
시를 생각하다 잠이 들고
시의 꿈을 꾸다 새벽이 오는
이 직업병, 지독한 병처럼 앓을 것이니
마침내 이 병의 마지막이 오면
신문에 실릴 내 부고기사 속의 사인은
오직 시이기를
시를 사랑한 즐거운 지병이기를
김종길, 황사현상(黃沙現象)
그 날 밤 금계랍 같은 눈이 내리던
오한의 땅에
오늘 발열처럼 복사꽃이 핀다
목이 타는 봄 가뭄
아 목이 타는 봄 가뭄
현기증 나는 아지랑이만 일렁거리고
앓는 대지를 축여 줄 봄비는
오지 않은 채
며칠째 황사만이 자욱이 내리고 있다
공광규, 길을 잃었다
맛있는 머루와 으름 덩굴을 좇아다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날이 어둡고 산짐승들은 울고
어린 나이에 얼마나 울며불며
길 잃은 것을 후회했던가
맛있는 것에 눈이 멀어
산을 둘러보지 못한 탓이었다
오늘 도심 골짜기에 들어 와서
길을 잃었다
먹고사는 데만 급급하다
쾌락의 토끼 꼬리만 정신없이 따라다니다
인생을 조감하지 못한 탓이다
박남희, 어린 곡선
코흘리개 시절 나는
누나와 무작정 교외선 열차에 올라
무전여행을 한 적이 있다
들판에는 냉이꽃이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한 바퀴 빙 돌아서 원능역이 다시 나올 때까지
중간에 절대로 내리면 안돼
엄마의 걱정 어린 당부를 뒤로 하고
차표도 없이 누나와 탄 교외선은
두근거리는 내 직선의 마음을 싣고
냉이꽃을 지나
의정부를 지나 청량리를 지나
먹고 싶어도 사먹을 돈이 없어서
군침만 돌게 하던 도너츠 파는 승무원을 지나
시퍼런 물이 출렁거리는 한강을 지나
차표 검사하는 차장의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지나
서빙고, 용산, 서울역을 지나는 동안에
직선이었던 내 마음은 어느새 곡선으로 휘어져
다시 원능역에 닿았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교외선을 따라 둥글게 흐르는 한강을 보았다
철커덕거리는 기차 소리를 따라 두근거리며 흐르던 한강은
어디서부터 꼬리를 감추었는지 온데간데없고
강물은 내 안에 둥글게 똬리를 틀고
그동안 직선으로만 알고 있던 세상을 구부려
도너츠 모양의 어린 곡선을 만들어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