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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 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조창환, 붉은 밤
시뻘건 달이 한아름 넘는
지평선 앞에 마주서서
평원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트럭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달려가는
저녁 무렵, 동녘 하늘 바라보며
소스라친다
누구든 꿈꾸었던 땅은 세상에 없구나
눈 흡뜬 나무들 늘어선 길 끝에
그리움, 꽉 조인 청바지처럼 뻣뻣하다
왈칵 꼬꾸라지는, 총 맞은 병사 같은
붉은 밤 속으로
고개를 깊이 꺾으며
무너진다
김선우, 뒤쪽에 있는 것들이 눈부시다
해변 풀밭까지 내려온 어미말은 둥그마니 잘 갈라진
바위틈에 코를 들이민 채 한나절을 푸르릉 조을고
흰 구름에 홀려 있다가도
어미말의 크낙한 엉덩이 사이로 푸릉푸릉 코를 들이밀고
봄 들꽃 환장하게 피었는데 섬은 자기 심장을 쿵쿵 쳐대며
자맥질하는 바다의 둥근 어딘가에 자꾸만 코를 들이밀고
나는 말방울을 까맣게 잊은 채 새로 핀 꽃들의 옴팡하니 깊은
엉덩이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킁킁거리다가
눈부셔 혼음에 겹곤 하는 것이다
이 섬이 처음 생겨날 때 어미의 가랑이
뒤쪽에서 뭉개져 흐르던 것들의 냄새
새봄마다 조금씩 풍겨 나오는지 내가 돌보던 말들
대지에 코를 박고 연신 킁킁거린다
아무렴 뿌리는 저 속에 두었으니 꽃은 뒤쪽에 자리한 사원이지
엎드려 있는 경전이 중심까지 달뜬 채 깊은 것이다
김광규, 만나고 싶은
모두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낯익은 얼굴들이다
내가 모르는 낯익은 사람들이 너무 많구나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어디였던가
병아리 떼 모이를 쪼으던 유치원 마당이었던가
솜사탕을 사 먹던 시골 장터였던가
아카시아꽃 한참 핀 교정의 벤치였던가
불볕 아래 앉아 버티던 봉제 공장 옥상이었던가
눈물 흘리며 짐승처럼 쫓기던 봄날의 광장이었던가
술내기 바둑을 두던 숙직실 골방이었던가
간첩을 뒤쫓으며 헐떡이던 산마루였던가
친구를 기다리던 새벽의 구치소 앞이었던가
두부장수 지나가던 골목길 여관방이었던가
줄담배를 피우던 산부인과 복도였던가
마늘을 싣고 도부치던 아파트촌이었던가
부가가치세 신고를 하던 세무소였던가
민방위 교육을 받던 변두리 극장이었던가
흰 봉투를 건네주던 다방의 구석 자리였던가
비행기를 갈아타던 어느 공항 대합실이었던가
고인을 추모하며 밤새우던 초상집이었던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모두가 거짓된 기억 헛된 착각이다
우리는 부딪쳤을 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는 낯선 사람들이 너무 적구나
이재무, 겨울밤
싸락눈이 내리고 날은 저물어
길은 보이지 않고
목쉰 개 울음만 빙판에 자꾸
엎어지는데 식전에 나간 아부지
여태 돌아오시지 않는다
세 번 데운 황새기 장국은 쫄고
벽시계가 열한 시를 친다
무거워 오는 졸음을 쫓고
문꼬리를 흔드는 기침 소리에
놀래 문 열면
싸대기를 때리는 바람
이불 속 묻어둔 밥
다독거리다 밤은 깊어
살강 뒤지는 새앙쥐 소리
서울행 기적 소리 들리고 오 리 밖
상엿집 지나 숱한 설움 짊어지고
된바람 헤쳐 오는 가쁜 숨소리
들린다 여태 아부지는 오시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