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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 소
네 커다랗게 뜬 검은 눈에는
슬픈 하늘이 비치고
그 하늘 속에 내가 있구나
어리석음이 어찌하여
어진 것이 되느냐
때로 지긋이 눈을 감는 버릇을
너와 더불어
오래 익히었구나
신동집, 얼굴
어제 만난 얼굴은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만난 얼굴은 어제의 얼굴이 아니올시다
좀 더 찢어지고 부서지고 이즈러진 얼굴의 복수(複數)
남은 것은, 단
하늘 밑 땅 위의 인간의 얼굴뿐입니다
일체의 풍경을 믿지 않는 마음의 얼굴뿐입니다
노래 한 절(節) 들리잖는
살해(殺害)당한 얼굴의 꿈이올시다
나의 항거의 의지가 내출(內出)을 시작한 후
어제 만난 얼굴은 오늘의 얼굴이 아니올시다
어제 악수한 손은 지금 쯤 썩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몇 사람의 인간의 이름이
오늘처럼 그리운 적이 없습니다
몇 사람의 인간의 얼굴이
오늘처럼 그리운 적이 없습니다
홍윤숙, 우체국 이야기
이제 우체국에 가서
원고를 부치는 노고도 필요없어졌지만
전화나 팩스 같은 문명의 이기로
대개는 볼일을 보고 말지만
그래도 나는 가끔 옛날처럼
편지나 시를 쓰면
그것들을 들고 골목을 지나 큰길을 건너
나들이 가듯이 우체국에 간다
우체국 아가씨도 옛날처럼 상냥한 소녀는 아니어서
낯선 얼굴의 무표정한 눈총이 서먹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숨결이 그리워서
필요도 없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으며
풀칠을 하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다
냇물 속에 떨어지는 잔돌 같은 작은 음향
그 소리 들으면서 나는 알 수 없는 감동에 가슴 젖는다
날마다 무언가 변하여 가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남아 있다는
그 작은 감동이 나를 위로한다
오늘도 한 통의 편지를 들고
차들이 질주하는 큰길을 건너서
옛날의 내 어머니 새 옷 갈아입고 나들이 가듯이
우체국에 간다
아, 거기 기다리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의
따스한 숨결
김승희, 흰 여름의 포장마차
나에게는 집이 없어
반짝이는 먼지와 햇빛 속의 창대가
훨, 훨, 타오르는 포플린 모자
작은 잎사귀 속의 그늘이
나의 집이야.
조약돌이 타오르는 흰 들판
그 들판 속의 자주색 입술
나에게는 방도 없고
테라스 가득한 만족도 없네
식탁가의 귀여운 아이들
아이들의 목마는 오직 강으로 가고
나는 촛불이 탈 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지었지
내 마차의 푸른 속력 속에서
그 날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으로
서투른 음악을 켜며
하루의 들판을 무섭게 달리는 나의 마차는
시간보다도 더욱 빠르고 강하여
나는 밤이 오기 전에
생각의 천막들을 다 걷어버렸네
그리고 또한 나의 몇 형제들은
동화의 무덤 곁에 집을 지었으나
오. 나는 그들을 경멸했지
그럼으로써 낯선 풍경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는 꿈이 없어
해가 다 죽어버린 밤 속의 밤이
별이 다 죽어버린 밤 속의 정오가
그리고 여름이 다 죽어버린
국화 속의 가을이
나의 꿈이야
콜탈이 눈물처럼 젖어 있는 가을들판
그 들판 속의 포장마차의 황혼
길상호, 소리의 집
그 집은 소리를 키우는 집
늑골의 대문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마루에 할머니 혼자 나물을 다듬거나
바람과 함께 잠을 자는 집
그 가벼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삐이걱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오는 집
단단하게 박혀 있던 못 몇 개 빠져나가고
헐거워진 허공이 부딪히며 만드는 소리
사람의 세월도 오래 되면 소리가 된다는 듯
할머니 무릎에서 어깨 가슴팍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들
아팠던 곳이 삭고 삭아서 만들어낸
관악기의 구멍을 통해 이어지는 가락들
나의 짧은 생으로는 꾸밀 수 없는
그 소리 듣고 있으면 내가 키워온 옹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바람 드나들며
나 또한 소리 될 것 같은데
더 기다려야 한다고 틈이 생긴 마음에
촘촘히 못질하고 있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