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 부서진 활주로
활주로는 군데군데 금이 가, 풀들
솟아오르고, 나무도 없는 넓은 아스팔트에는
흰 페인트로 횡단로 그어져 있다. 구겨진 표지판 밑
그인 화살표 이지러진 채, 무한한 곳
가리키게 놓아두고
방독면 부서져 활주로변 풀덤불 속에
누워 있다. 쥐들 그 속 들락거리고
개스처럼 이따금 먼지 덮인다. 완강한 철조망에 싸여
부서진 총기와 방독면은 부패되어 간다
풀뿌리가 그것들 더듬고 흙 속으로 당기며
타임지와 팔말 담배갑과 은종이들은 바래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철조망에 걸려
찢어지기도 한다. 구름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타이어 조각들의 구멍 속으로
하늘은 노오랗다. 마지막 비행기가 문득
끌고 가 버린 하늘
이장희, 실바람 지나간 뒤
님이시여
모르시나이까
지금은
그리운 옛날 생각만이
시들은 꽃
싸늘한 먼지
사그라진 촛불이
깃들인 제단(祭壇)을
고이고이 감돌면서
울음 섞어 속삭입니다
무엇을 빌며
무엇을 푸념하는지요
고찬규, 금은방
더 많은 주름을 거느린 담에 기댄 채
할머니는 꾸벅꾸벅 끄덕이며
청춘을 푸른 하늘처럼 펼쳐 놓는 중
햇빛은 이내 뒤따라온 햇빛에 말리면서
과거를 비쳐주지 못하고 바삐 사라진다
가지런히 돌고 돌았다. 골목골목은
거대한 팽이가 되어
스스로 상처를 드러내는
계절은 채찍이었다. 변해야만 했다
담쟁이는 담의 일부
잎이 또 한 번 피고 졌다
듬성듬성 낡은 시간이 덧칠해져 있다
저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이 절단되고
아기들은 울었던가
시장이 있고 두 대의 약국과 하나의 병원
많은 소리들이 숨쉬기 시작하면
할머니가 기댄 담벼락 맞은 편 금은방 앞에는
어떤 시계로도 돌려놓을 수 없는 화려한 추억
주섬주섬 할머니가 볕에 말리고 있는 것은
꿈으로 갈고 닦은 보석인가
서로 다른 빛으로 반짝이는 각자의 둥지
금은방? 그렇지 금이 바로 방이지
시계가 시간을 따라 떨어져 나가고
금은방이 된 시계방
시침에 찔려 언제나 봄인 뻐꾸기와
목과 목을 옭아매는 목걸이
주렁주렁 장신구며 보석이
저마다 제 몫을 반짝인다
햇빛은 할머니를 찔러 보지만 더 이상
청춘은 푸른 하늘처럼 펼쳐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오늘도 금 간 담벼락에 기댄 채
낙타의 등허리 같은 길을 꾸불꾸불 가는 중
정호승, 삶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이 될 때가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릴 때가 있다
밤이 지나지 않고 새벽이 올 때
어머니를 땅에 묻고 산을 내려올 때
스스로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모든 증오일 때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린다
김수영, 풍뎅이
너의 앞에서는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았다
백년이나 천년이 결코 긴 세월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사랑의 테두리 속에 끼여 있기 때문이 아니리라
추한 나의 발밑에서 풍뎅이처럼 너는 하늘을 보고 운다
그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
네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 안다
너의 이름과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소금 같은 이 세계가 존속할 것이며
의심할 것인데
등 등판 광택 거대한 여울
미끄러져가는 나의 의지
나의 의지보다 더 빠른 너의 노래
너의 노래보다 더한층 신축성이 있는
너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