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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아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 버짐이니라
오 박토여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 버린 메밀 농사와
쭉쭉 골이 패인
내 손톱 밑의 반달의 고사(枯死)여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 섬
꿈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물도 불도 그 아래선
한 줌 먼지 되어 풀썩거리는 승천의 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이니라
노향림, 꿈
바다가 앞에 와 있었다
뻘밭 사이에 처박고 있는
그의 얼굴이 늘 보고 싶었다
신음소리가 귀신이 되어 나오던
집 한 채
철사토막 같은 손으로
바다소나무들은
양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사람냄새가 그리웠다
긴 복도 끝
육조 다다미방에 복막염으로
나는 누워 있었다
사금파리, 야생초, 생고무 냄새
바람 사이의 흐릿한 호얏불
오래 문 닫힌 대장간에 쌓여 있는
정적(靜寂)들이 보고 싶었다
아, 손과 발을 달고 날아다니는
아이들 소리들이 보고 싶었다
나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몸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미끈거리는
소금기만이 마음에 가득히
묻어났다
바다는 늘 앞에 와 있었다
문정희, 새떼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피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도 모르게
번쩍이는 길이 되어
떠나감 되어
끝까지 잠 안든 시간을
조금씩 얼굴에 묻혀가지고
빛으로 포효(咆哮)하며
오르는 사랑아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울 이유도 없이
하늘로 하늘로 가고 있나니
이수익, 토르소
모가지도 버려야 한다
두 팔도 잘라야 한다
남아 있는 흉상으로 더욱 절실한
언어를 만들기 위하여
무서운 단죄를 내려야 한다
파괴의 구도로 이루어질 뿐인
토르소
차라리 상실이 아름다운
조태일, 쌀
멍청하게 와버린 봄빛 위에서
머리 푼 저 북풍은 살아 있다
흰 이빨은 펄펄 살아 있다
만인에게 후려치는 내 눈물보다도
더 예쁘고 날쌘 남도평야는 살아 있다
누런 땅빛은 영원히 살아 있다
남루한 삼베 치마저고리를 걸친
저 누님 같은 아낙네의 살빛은 살아 있다
그의 전신경은 펄펄 살아 있다
눈을 감으면 어지럽게 쏟아지는
쌀은 펄펄 살아 있다
쌀 속의 모든 사연은 살아 있다
북풍이 봄빛을 깔아뭉개는 소리
내 눈물이 만인을 내리치는 소리
쌀이 쌀을 살해하는 소리
모든 소리들은 다 살아 있다
펄펄 살아서 쌀은
내가 밤마다 훔치는 한국어를 노래한다
뱀의 혀보다도 더 빨리 노래하며
내 온몸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