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송별(送別)
재 너머 두서너 집 호젓한 마을이다
촛불을 다시 혀고 잔 들고 마주 앉아
이야기 끝이 못 나고 밤은 벌써 깊었다
눈이 도로 얼고 산머리 달은 진다
잡아도 뿌리치고 가시는 이 밤의 정이
십 리가 못 되는 길도 백 리도곤 멀어라
김남조, 겨울에게
들어오너라
겨울
나는 문고리를 벗겨둔다
삼복에도
손발 몹시 시렵던
올해 유별난 추위
그 여름과 가을 다녀가고
너의 차례에
어김없이 달려온
겨울, 들어오너라
북극 빙산에서
살림하던 몸으로
한 둘레 둘둘 말은
얼음 멧방석쯤은 가져왔겠지
어서 피려무나
겨울
울지도 못하는
얼어붙은 상처
얼얼한 비수자국
아무렴 투명하고 청결한
수정 칼날이고말고
거짓말을 안 하는
진솔한 네 냉가슴이고 말고
아아 그러면서
소생하는 새봄을
콩나물 시루처럼 물 주며 있고말고
하여간에
들어오기부터 해라
겨울
박희진, 미래의 시인에게
어디서인지 자라고 있을
너의 고운 수정의 눈동자를 난 믿는다
또 아직은 별빛조차 어리기를 꺼리는
청수한 이마의 맑은 슬기를
너를 실은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어쩌면 꿈속에서 보았을지도 몰라
얼음 밑을 흐르는 은은한 물처럼
꿈꾸는 혈액이 절로 돌아갈 때
오 피어다오 미래의 시인이여
이 눈먼 어둠을 뚫고 때가 이르거든
남몰래 길렀던 장미의 체온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보여다오
진정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은 길이 꺼지지 않을 불길이 되리니
김상옥, 강 있는 마을
한 구비 맑은 강은 들을 둘러 흘러가고
기나긴 여름날은 한결도 고요하다
어디서 낮닭의 울음소리 귀살푸시 들리고
마을은 우뜸 아랫뜸 그림같이 놓여 있고
읍내로 가는 길은 꿈결처럼 내다뵈는데
길에는 사람 한 사람 보이지도 않아라
최종천, 가엾은 내 손
나의 손은 눈이 멀었다
망치를 쥐어 잡기 보다는
부드러운 무엇을 원하다
강요된 노동에 완고해지며
대책 없이 늙어가는 손
감각의 입구였던 열개의 손가락은
자판 위를 누비며
회색의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던
손의 시력은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다
열개의 손가락에서 노동은 시들어버렸다
열개의 열려있는 입을 나는 주체할 수가 없다
모든 필요를 만들어내던 손
인간의 유일한 실재인 노동보다
입에서 쏟아지는 허구가 힘이 되고 권력이 된다니
나의 손은 이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노동을 잃어버리고
허구가 되어간다
상징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