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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따뜻한 그늘
자정이 넘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새벽을
여럿이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희미하게
죽어가는 김종삼이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불치의 시인이었다 시를 찾아서
시장통으로 병원으로 벙거지를
쓰고 다녔다
그런 그의 뒤로 바람이 세차게 내리쳐서
등허리를 적시고 가로수 잎들이
우수수 져내렸다 좁쌀만한 빛에
'주의'도 '순수'도 아닌 그늘이 드리웠다가
사라져갔다 아무도 그늘을 보지 못했으나
그늘은 따뜻하였다 사랑이라고들
그랬다
박이도, 낱말
화제가 없는 주말을 간다
내 주머니 속엔 은행(銀杏)이 두 알
15일이 지나면 가불(假拂)이 나온다
거리에 앉은 구두 수선공(修繕工)
안경을 낀 채 실귀를 찾은
그의 낡은 모자위엔
코스모스 한 송이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인생의 모습이 나는 좋다
노래하는 '브랜다 리'의 젖가슴에
가을꽃이 한 다발
그녀의 미소 짓는 얼굴이
더 황홀하다는
화제가 없는 주말
Der, Des, Dem, Den 정관사를 외우며
신설동(新設洞) 로타리를 걷던
까까머리 친구가 장가를 든다
신경림, 시골 큰집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
대학을 나온 사촌형은 이 세상이 모두
싫어졌다 한다.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를 뒤적이다 훌쩍 뛰쳐나가면
나는 안다 형은 또 마작으로
밤을 새우려는 게다. 닭장에는
지난봄에 팔아 없앤 닭 그 털만이 널려
을씨년스러운데 큰엄마는
또 큰형이 그리워지는 걸까. 그의
공부방이던 건넌방을 치우다가
벽에 박힌 그의 좌우명을 보고 운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그
좌우명의 뜻을 나는 모른다. 지금 혹
그는 어느 딴 나라에 살고 있을까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는
국화꽃이 피어 싱그럽다 그것은
큰형이 심은 꽃. 새 아줌마는
그것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화사한
코스모스라도 심고 싶다지만
남의 땅이 돼 버린 논뚝을 바라보며
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
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이철균, 설화
강은 산이 되려 하고
산은 강이 되려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강물과 같이 흐르는
시간 위에 영겁에서부터인 양
낚시를 던지고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강은 산이 되려 하고
산은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런 대로 산은 풍란(風蘭)이며
사슴을 길렀고 이리도 길렀다
상은 은어며 게를 길러
그런 대로 바다로 흘렀다
그리하여 소년은 강가에서 언제나
산과 마주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꿈을 깨고 난 뒤 소년은
강과 산 사이의 구름다리 같은
무지개의 뜻을 안 듯도 했다
이탄, 알려지지 않는 허전
나는 땅을 샀다
경기도 산골, 공원묘지의 한 귀퉁이
어머니를 위해 5평
성묘할 우리를 위한 공터로 4평
말하자면 어머니의 묘를 위해
나는 9평의 땅을 샀다
백운대가 보이고 멀리 이름 모를 봉우리가 나란히 보이는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곳이라고들 했다
사람들은 흙이 참 좋다고도 했다
나는 땅을 샀다. 암, 나는 땅을 샀지, 사구 말았구!
그러나, 그 땅은 누구의 것이냐
관 위에 후두둑 후드득 흙이 부어지고 가난과 병으로 시달린 목숨 위에 흙이 부어지고
우리들은 하산했다
그날 나는 분명히 계약하고, 돈을 내고 땅을 샀다
그러나 나는 평생 마음에
아픈 땅 9평을 갖게 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