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BGM]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게시물ID : lovestory_903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1
조회수 : 29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7/21 09:53:37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김광규시론(詩論)

 

 

 

여름 한낮 땡볕 아래

텅 빈 광장을 무료하게 지나가다

문득 멈춰서는 한 마리 개의

귓전에 들려오는

 

또는 포도밭 언덕에

즐비한 시멘트 십자가를 타고

빛과 물로 싱그럽게 열리는

 

소리를

 

바닷속에 남기고 물고기들은

시체가 되어 어시장에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본다

저 많은 물고기의 무연한 이름들

 

우리가 잠시 빌어 쓰는

이름이 아니라 약속이 아니라

한 마리 참새의 지저귐도 적을 수 없는

언제나 벗어 던져 구겨진

 

언어는 불충족한

소리의 옷

 

받침을 주렁주렁 단 모국어들이

쓰기도 전에 닳아빠져도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아무런 축복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따라

바람의 자취를 쫓아

헛된 절망을 되풀이한다







2.jpg

오규원지는 해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서서 각각 있었다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방을 고쳐 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 번 비틀었다

젊은 남녀가 잠깐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나는 옷 밖으로 쑥 나와 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3.jpg

감태준몸 바뀐 사람들

 

 

 

산자락에 매달린 바라크 몇 채는 트럭에 실려 가고

어디서 불볕에 닳은 매미들 울음소리가 간간이 흘러왔다

다시 몸 한 채로 집이 된 사람들은 거기

꿈을 이어 담을 치던 집 폐허에서 못을 줍고 있었다

 

그들은꾸부러진 못 하나에서도 집이 보인다

헐린 마음에 무수히 못을 박으며

또 거기발통이 나간 세발자전거를 모는 아이들 옆에서

아이들을 쳐다보고 한 번 더 마음에 못을 질렀다

 

갈 사람은 그러나못 하나 지르지 않고도 가볍게 손을 털고

더러는 일찌감치 풍문(風聞)을 따라간다 했다

하지만어디엔가 생()이 뒤틀린 산길

끊이었다 이어지는 말매미 울음소리에도 문득문득 발이 묶이고

 

생각이 다 닳은 사람들은

거기 다만 재가 풀풀 날리는 얼굴로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4.jpg

이형기황혼(黃昏)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지구 하나 그 속으로

꽃송이처럼 떨어져간다

그래도 아무 소리가 없는

오늘의 종말

실은 전세계의 벙어리들이 일제히

무엇인가를 외쳐대고 있다

소리로 가공되기 이전의

원유 같은 목청으로







5.jpg

윤동주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