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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시론(詩論)
여름 한낮 땡볕 아래
텅 빈 광장을 무료하게 지나가다
문득 멈춰서는 한 마리 개의
귓전에 들려오는
또는 포도밭 언덕에
즐비한 시멘트 십자가를 타고
빛과 물로 싱그럽게 열리는
소리를
바닷속에 남기고 물고기들은
시체가 되어 어시장에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본다
저 많은 물고기의 무연한 이름들
우리가 잠시 빌어 쓰는
이름이 아니라 약속이 아니라
한 마리 참새의 지저귐도 적을 수 없는
언제나 벗어 던져 구겨진
언어는 불충족한
소리의 옷
받침을 주렁주렁 단 모국어들이
쓰기도 전에 닳아빠져도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아무런 축복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따라
바람의 자취를 쫓아
헛된 절망을 되풀이한다
오규원, 지는 해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서서 각각 있었다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방을 고쳐 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 번 비틀었다
젊은 남녀가 잠깐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나는 옷 밖으로 쑥 나와 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감태준, 몸 바뀐 사람들
산자락에 매달린 바라크 몇 채는 트럭에 실려 가고
어디서 불볕에 닳은 매미들 울음소리가 간간이 흘러왔다
다시 몸 한 채로 집이 된 사람들은 거기
꿈을 이어 담을 치던 집 폐허에서 못을 줍고 있었다
그들은, 꾸부러진 못 하나에서도 집이 보인다
헐린 마음에 무수히 못을 박으며
또 거기, 발통이 나간 세발자전거를 모는 아이들 옆에서
아이들을 쳐다보고 한 번 더 마음에 못을 질렀다
갈 사람은 그러나, 못 하나 지르지 않고도 가볍게 손을 털고
더러는 일찌감치 풍문(風聞)을 따라간다 했다
하지만, 어디엔가 생(生)이 뒤틀린 산길
끊이었다 이어지는 말매미 울음소리에도 문득문득 발이 묶이고
생각이 다 닳은 사람들은
거기 다만 재가 풀풀 날리는 얼굴로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이형기, 황혼(黃昏)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지구 하나 그 속으로
꽃송이처럼 떨어져간다
그래도 아무 소리가 없는
오늘의 종말
실은 전세계의 벙어리들이 일제히
무엇인가를 외쳐대고 있다
소리로 가공되기 이전의
원유 같은 목청으로
윤동주, 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