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는 처음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차례로 크리스트교 세력이 국가체제의 장해가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587년 히데요시는 큐슈출병 때에 키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인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나가사키(長崎)를 예수회의 교회에 접근시키고 있는 것을 알고 우선 다이묘들의 크리스트교 입신(入信)을 허가제로 하고❶ 이어서 바테렌 추방령을 내려 선교사의 국외추방을 명했다.
그러나 이듬해 히데요시가 해적단속령을 내려 나가사키・쿄토・사카이(堺) 등의 상인의 해외도항을 보호하는 등 남만무역(南蛮貿易;당시의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과의 무역)을 장려했기 때문에 크리스트교의 단속은 철저하지 못하게 끝났다.❷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에서는 명의 국력이 쇠퇴해가고 국제질서는 변화해갔다.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 대해서는 고아(Goa)에 포르투갈 행정부, 마닐라에 스페인 행정부, 고산국(대만) 등에 복속과 조공을 요구했다. 또 조선에 대해서는 대마도의 소오(宗;종)씨를 통하여 조공과 명 출병의 선두를 요구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히데요시는 몸소 출병을 결단하여 1592년과 1597년 2번에 걸쳐 조선침략을 행하였다. 이것을 분로쿠·케이쵸오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 부르고 있다.
전후 7년에 걸쳐 일본군의 조선침략은 조선민중에 지대한 피해를 주어, 반일감정이 거세어졌다. 또 국내적으로는 방대한 전쟁비용과 병력을 낭비하여 토요토미정권을 쇠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❶ 이때, 크리스트교를 버리지 않았던 아카시(明石)성주(城主)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은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러나 일반인의 신앙은 본인 나름으로 금지하지 않았다.
❷ 1596년 스페인선 산 페리페호가 토사(土佐;현재의 시코쿠(四国) 코오치(高知)현)에 표착했을 때 선적된 짐을 몰수하여 내쫓았다.(산 페리호 사건) 더욱이 히데요시는 선교사・신자를 붙잡아 나가사키에 보내서 처형했다.(26성인 순교) 사건의 원인은 스페인이 영토확장에 선교사를 이용하고있다고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록·경장의 역(文禄・慶長の役:분로쿠·케이쵸오노 에키;임진왜란·정유재란)
히데요시 정권은 우선 검지(検地;토지조사)를 강화하거나 인구조사를 위하여 히토바라이(人掃令:병농 분리에 대한 법)를 내걸어 총동원체제를 정비하였다. 무사뿐만이 아니라 인부(陣夫)와 선원(水手)으로서 농민도 징발하여 16만에 가까운 군세를 가지고, 1592년 조선출병을 강행하여 문록의 역(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처음 일본군은 조선 측의 방위체제가 정비되지 않는 중에 진격을 계속해 한성(漢城;현재의 서울), 더욱이 평양도 점령했다. 그러나 의병이라 불리는 지주층에 인솔된 조선민중의 저항운동이 고조되고 또 이순신 등의 수군이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더욱이 조선의 요청에 응한 명군이 출격하자 일본군은 형세가 불리해져 강화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히데요시는 명과의 강화를 유리하게 진행하려 했지만 전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의 남쪽 사도(四道)의 할양 등을 포함한 히데요시의 강화조건은 명에 무시되었다.
1597년 히데요시는 14만의 병력을 2번 도해시켜 반도남부의 점령을 시도하였다. 이 때 명군과 의병의 저항은 격렬하여 일본군은 이에 대해 철저한 토벌을 행하였다. 엄청난 수의 조선민중이 죽임당하고 논밭은 망가졌다.
경장의 역(정유재란)은 히데요시의 죽음에 의해 끝나지만 이 동안 일본에 연행된 2~3만이라고도 말해지는 포로 중에는 도공, 인쇄공, 주자학자 등이 있어 일본에 새로운 문화를 전했지만 그것들이 조선민중의 커다란 희생 위에서 초래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