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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송, 반딧불
단순히 사랑만을 노래하기엔
하늘은 너무나도 깊고 푸르렀다
끝 모를 저 무명(無名)의 들판에
훨훨 나는 새의 모습으로
영원의 모서리에 닿는다
땅 위에 영그는 작은 열매들은
저마다 평화로운 식탁 둘레에
노동의 새벽을 열어 주나니
하늘에게 가는 목숨이야
어디 날개 달린 새 뿐이랴
모시 수건으로 정갈하게 닦아낸
쟁반위의 밤하늘엔
반딧불로 어지러운
떠돌이의 고향이 보인다
이수익, 단오
음(陰) 오월에도 초닷새 수릿날엔
아내여, 그대는 춘향이가 되라
그러면 나는 먼 숲에 숨어들어 그대를 바라보는
이도령이 되리라
창포를 물에 풀어 머리를 감고
그대는 열일곱, 그 나이쯤이 되어
버들가지엔 두 가닥 그넷줄을 매어
그대 그리움을 힘껏 밟아 하늘로 오르면
나도 오늘 밤엔 그대에게
오래도록 긴 긴 편지를 쓰리라
하늘로 솟구쳤다 초여름 서늘한 흰 구름만 보고
숨어 섰던 날 보지 못한 그대의 안타까움을
내가 아노라고
그대 잠든 꿈길 위에 부치리라
구상, 강가에서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처럼 띄워 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고 이뤄질 것이다
저 망망한 바다 한 복판일는지
저 허허한 하늘 속일는지
다시 이 지구로 돌아와설는지
그 신령한 조화 속이사 알 바 없으나
생명의 영원한 동산 속의
불변하는 한 모습이 되어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처럼 띄워 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고 이루어질 것이다
이장욱, 절규
모든 것은 등 뒤에 있다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거리의 나무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만 몸을 떨었다
곧 네거리에 서 있는 거대한 주유소를 지나야
할 테지만 나는 아무래도 기나긴 페이브먼트
이 낯선 거리의 새벽 공기가 다만 불안하였다
천천히 붉은 구름이 하늘을 흐르기 시작했으며
흐릿한 전화 부스에는 이미 술 취한 사내들
어디론가 가망 없는 통화를 날리며 한량없었으므로
나는 길 끝에 눈을 둔 채 오 분 후의 세계를
다만 생각할 수 있을 뿐. 어느 단단한 담 안쪽
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믿을 수 없는 고음역의
레퀴엠, 등 뒤를 따라오는 몇 개의 어두운
그림자, 쉽게 부러지는 이 거리의
난간들, 나는 온힘을 다해 아주 오래된 멜로디를
떠올렸으나 네거리의 저 거대한 주유소
그리고 붉은 불빛의 편의점 앞에서
결국 뒤돌아보게 되리라, 결국 되돌아
보는 그 순간 나는 어떤 눈빛을 지니게 될는지
두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어떻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는지
다만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등 뒤의 세계
김사림, 한잔하세
우리
한잔하세
아픈 사랑 이야기사
나중으로 미뤄두고
산다는 의미는
참으로 무엇일까
마음이 맞고
생각이 맞아
눈빛만 쳐다보아도 가슴이 아픈
여자와 남자 얘기랑
꼭꼭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고
어차피
산다는 것은
끈적끈적한 위장 속처럼
들여다보지 않을수록 더 좋은
자네와 나의 안방 같은
어눌한 이야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