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기념식수
형수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은 땅의 얇은
천장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러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영혼은 온 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
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
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 떨어진다
아이들과 감자를 구워먹으며 나는 일부러
어린왕자의 이야기며 안델센의 추운 바다며
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 살이를 말해 주었지만
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본다 하여도
이 오후의 보물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갓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가
형수가 죽었다
아이들은 너무 크다고 마다했지만
나는 너희 엄마를 닮은 은수원 사시나무 한 그루를
너희들이 노래부르며
파놓은 푸른 구덩이에 묻는다
교외선의 끝 철길은 햇빛
철철 흘러넘치는 구릉지대를 지나 노을로 이어지고
내 눈물 반대쪽으로
날개도 흔들리지 않고 날아가는 것은
무한정 날아가고 있는 것은
장하보, 원(願)
한 줄기 소나기처럼
그렇게 왔다 가는
와락 달려드는 그리움의
한 나절을 어이해 품속에
붙들어 잠재울 수 있을까
허공을 건너듯이
무한으로 가는듯이
그 조촐한 가슴으로
밋밋이 솟은 산정
어이해 그 속속들이
깃들어 잠들 수가 있을까
홍두표, 나는 곰이로소이다
나는 곰이로소이다
미련하고 굼되고
못나디 못난 곰이로소이다
무료한 날 도토리 줍고
어느 산기슭 덤불속에서 뒹굴다가도
한 낮이 겨우면 산가재를 잡기도 하고
때로는
내 발바닥을 핥기도 하는
지지리도 못난 곰이로소이다
그러나 한 번도 단 한번도
남의 발바닥을
핥아 본 일이 없는
나는 곰이로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나고 어리석은 곰이로소이다
고재종, 성숙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 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강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 날 듯
온통 보석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강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 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 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 치나 더 불린 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 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 줄도 알거니
김남조, 산에게 나무에게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갔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나무 곁에 섰었네
산과 나무들과 내가
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
내가 산을 내려 왔네
내가 나무를 떠나 왔네
그들은 주인 자리에
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