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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 저녁해
어느 해 늦가을 어느 날 오후
나는 경부선 급행열차를 타고 있었다
열차가 수원(水原)을 지날 무렵
서호(西湖)에 반사된 현란한 저녁해가
차창 가득히 어떻게나 눈부시던지
나는 골든 델리셔스라는
사과덩이 속을 파고드는
한 마리 눈 먼 벌레가 되었다
추수가 끝난 들녘도
잎이 진 잡목 숲도, 인가(人家)도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과육(果肉) 속이었다
이우걸, 모란
피면 지리라
지면 잊으리라
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
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
김선우, 감자 먹는 사람들
어느 집 담장을 넘어 달겨드는
이것은
치명적인 냄새
식은 감자알 갉작거리며 평상에 엎드려 산수 숙제를 하던
엄마 내 친구들은 내가 감자가 좋아서
감자밥 도시락만 먹는 줄 알아
열한 식구 대꺼리를 감자 없이 무슨 수로 밥을 해대냐고
귀 밝은 할아버지는
땅 밑에서 감자알 크는 소리 들린다고 흐뭇해 하셨지만
엄마 난 땅속에서 자라는 것들이 무서운데
뿌리 끝에 댕글댕글한 어지럼증을 매달고
식구들이 밥상머리를 지킨다 하나둘 숟가락 내려놓을 때까지
엄마 밥주발엔 숟가락 꽂히지 않는다
어릴 적 질리도록 먹은 건 싫어하게 된다더니
감자 삶은 냄새
이것은
치명적인 그리움
꽃은 꽃대로 놓아두고 저는 땅 밑으로만 궁그는
꽃 진 자리엔 얼씬도 하지 않는
열한 개의 구덩이를 가진 늙은 애기집
신달자, 노을
드디어 말하고 말았구나
지그시 혀 물어
피를 삼키듯
먼 산 바라보며 휘파람만 불던
우리
날저무는 녹음천지 아래서
와르르 무너지며
가슴이 터졌구나
두 영혼이 겨냥한
불화살을 맞은 하늘
하늘도 후련하여라
찬란한 황금등을
그제서야 켜는구나
송수권, 세한도(歲寒圖)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 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