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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봄비
조용히 젖어드는
초가(草家) 지붕 아래서
왼종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月谷嶺) 삼십 리(三十里)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마을이라
봄비는 나려
젖은 담 모퉁이
곱게 돌아서
모란 움 솟는가
슬픈 꿈처럼
김기택,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창문이 모두 아파트로 되어 있는 전철을 타고
오늘도 상계동을 지나간다
이것은 32평, 저것은 24평, 저것은 48평
일하지 않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창문에 있는 아파트 크기나 재본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내 어릴 적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다
아직 이 세상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미래처럼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내 얼굴과 행동과 습관을 보고
내 어린 모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어릴 적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듯이
기억은 끝내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독한 망각은 내게 이렇게 귀띔해 준다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을 거라고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자
아파트로 된 창문들이 일제히 깜깜해지더니
또 다른 아파트 창문 같은 얼굴들이 대신 나타난다
내 얼굴도 어김없이 그 사이에 끼여 있다
어릴 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일도, 저녁놀
작은 방안에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 피우고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모가지 앞은 잊어버려라
하늘 저 편으로
둥둥 떠가는
저녁 놀
이 우주에
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붉은 꽃밭 속으로
붉은 꿈나라로
김용호, 5월이 오면
무언가 속을 흐르는 게 있다
가느다란 여울이 되어
흐르는 것
이윽고 그것은 흐름을 멈추고 모인다
이내 호수가 된다
아담하고 정답고 부드러운 호수가 된다
푸르름의 그늘이 진다
잔 무늬가 물살에 아롱거린다
드디어 너, 아리따운
모습이 그 속에 비친다
오월이 오면
호수가 되는 가슴
그 속에 언제나 너는
한 송이 꽃이 되어 방긋 피어난다
오세영, 강물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