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우, 꽃 꺾어 그대 앞에
그대 큰 산 넘어 오랜만에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두 눈에
넘치는 눈물 애써 누르며
끝없이 그대를 바라보게 하라
그대 큰 산 넘어 이슬 털고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그대의 발, 머리 풀어 닦으며
오히려 기쁨에 잦아드는
목소리로
그대를 위하여
길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라
윤동주, 모란봉에서
앙당한 솔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
허무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로
재잘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이용악, 달 있는 제사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새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황동규, 퇴원 날 저녁
흑반(黑斑) 잔뜩 끼어 죽어가는 난 잎 어루만지며
베란다 밖을 살핀다
저녁 비가 눈으로 바뀌고 있다
주차장에 누군가 차 미등 켜논 채 들어갔나
오른쪽 등 껍질이 깨졌는지
두 등 색이 다르다
안경을 한번 벗었다 다시 낀다
눈발이 한번 가렸다가
다시 빨갛고 허연 등을 켜놓는다
난 잎을 어루만지며 주인이 나오기 전에
배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
다시 만날 때까지는 온기를 잃지 말라고
다시 만날 때까지는
눈감지 말라고
치운 세상에 간신히 켜든 불씨를
아주 끄지 말라고
이 세상에 함께 살아 있는 그 무엇의
난이 점차 뜨거워진다
신석정, 네 눈망울에서는
네 눈망울에서는
초록빛 오월
하이얀 찔레꽃 내음새가 난다
네 눈망울에서는
초롱초롱한
별들의 이야기를 머금었다
네 눈망울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아득한 종소리가 들린다
네 눈망울에서는
머언 먼 뒷날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이 보인다
네 눈망울에는
손잡고 이야기할
즐거운 나날이 오고 있다